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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Jan 28. 2022

평화의 정원

심장도 전기도 모두 잠든 시각에 비로소 참았던 숨을 터트린다.

2022.01.24




  커다란 감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침묵하고 함구해야만 하는 그 깊은 처연함이 끝내 파열음이 되어 흐른다. 성난 갈기처럼 다가와 덮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되돌아간다. 바다가 어떻게 감자처럼 보일 수 있니, 비웃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바다의 외로움이 채칼로 막 살점을 깎아낸 상처투성이 감자로 보이는 것을. 



  감자,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도 끝까지 흙을 움켜쥐고 뻗어나간다. 더듬어 찾는 성긴 손놀림에 그 퍽퍽하고 성긴 몸뚱이를 내민다. 궁색에 몰린 식탁에서도, 어둠에 갇힌 땅굴에서도 죽지 마라, 살아라 난기(暖氣)를 전한다. 



  아직도 네가 꿈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아이들이 꿈이야. 꿈같이 몽롱한 길을 걷다 펄썩 엎어졌다. 이제 막 잇대어 지나가려던 낯선 숲에서 등(燈)을 잃어버렸다. 얄팍한 종아리에 누군가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놓았다. 매가리 없이 주저앉는다. 출산 이후의 삶이 이토록 다른 것이라면 이때까지 받아온 교육과 성취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누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해에 묻어버린 것은 아닐까? 함께 걷던 이들은 어디 갔을까? 두꺼운 전문 서적을 노려보며 서로의 팔짱을 끼고, 경쟁하고 격려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이제 내가 갖춰야 하는 덕목은 모성애 하나다. 마땅히, 아이들의 웃음으로 충전해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쟁취해내는 강인한 여성이 돼라 한다. 등골을 내주고 알맹이를 파주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친구들의 타임라인이 아기 사진으로 가득하다. 프로필에 닮은 듯 낯선 아이가 대신 눈 마주친다. 어떤 과로 진학할 거니, 걔랑은 어떻게 됐니, 모의고사 망했어, 토익 점수가 신발 사이즈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소소한 말들이 구름처럼 흩어져 허공을 맴돌다가 도로 빗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날들이 이마에 어렸다 땅속에 숨어 버린다. 빛바랜 상장들은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누워 있다. 밥솥이 뜨거운 김을 내뿜고 세탁기가 어지럽게 돌아간다. 세상은 쉬지 않고 변한다는 데, 나는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새벽 두 시가 되길 기다린다. 심장도 전기도 모두 잠든 시각에 비로소 참았던 숨을 터트린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어둠을 탐미한다. 깨어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피곤에 저항한다. 자꾸 꿈틀대는 나보다는 AI가 훨씬 더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의 무가치함에 입맛을 다시며 절망의 기쁨에 빠져든다. 



  위험한 발언이다. 경솔한 마음이다. 홱 뺏어 들고 스케치북을 북 찢어 아궁이에 쑤셔 넣는다. 기다렸다는 듯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오른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 버려라. 



  다시 책상 앞에 마주 앉는다. 다시 바다를 떠올린다. 바다는 허무해서 싫다던 엄마의 말이 등대선처럼 떠 있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언젠가 던졌던 비수가 메아리처럼 내게로 와 박힌다. 내 뒤에 엄마의 그림자가 서 있다. 엄마가 이미 걸어간 길이다. 넌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따라서 되뇐다. 흘러가는 물처럼 돌아서서 아이에게 보낸다. 넌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나는 나일까, 엄마일까? 엄마도 나일 수 있을까? 엄마도 꿈꿔도 되는 걸까? 상자 속에 잠긴 날개가 잠자리의 것처럼 얇고 투명하다. 금세 바닷물에 절여 찢어질 것 같다. 



  지금까지 이룬 것 파도처럼 허물어져도, 살아가는 게 감자처럼 답답하고 목이 메어도 마음 깊은 곳 평화의 정원이 있다. 멈추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를 감싼다. 두 손에 움켜졌던 등(燈)을 잃어버려도, 이제까지 나를 인도했던 지도에 길이 끊겨도 빛이 내 안에 있다. 진한 숨을 들이쉴수록 몸의 힘이 빠진다. 공기가 들어찰수록 몸이 고요히 떠오른다. 점멸하던 빛이 팽창한다. 루미의 시가 다가와 말한다. “자유롭기를 추구하고 있는 나의 자아로부터 자유롭기를 저는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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