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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Mar 21. 2022

오목눈이의 침묵

처음 써 본 우화

2022.03.07



  뾰족한 양 귀가 가볍게 살랑였다. 날카로운 발톱을 털 속에 감춘 채 몸을 낮추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부드럽게 휘어진 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철장이 드넓은 목장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구멍은 단 한 곳, 호스가 드나드는 통로였다. 지난밤, 삵은 이미 그 구멍을 넓혀 놓았다. 단단한 두 발로 철장 아래 땅을 둥글게 팠다. 삵은 유연하게 몸을 늘려 구멍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둥이에는 새빨간 피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다. 구멍 주위로 까만 닭털이 숫눈처럼 흩날렸다.


  날이 밝자 삵의 소행이 더 소상히 드러났다. 오래된 참나무 위로 박새가 날아와 앉았다. 넥타이같이 까만 털을 부리로 다듬으며 목장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오목눈이가 뒤따라와 칡넝쿨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박새는 오목눈이를 보고 이내 자리를 뜨려 했으나, 오목눈이는 잽싸게 말을 걸었다.


  “어머 어머. 소식 들으셨어요? 아니지, 이미 보셨죠? 목장에 살던 오골계 말이에요. 간밤에 삵에게 그만 꽁지를 다 뽑혀버렸잖아요. 말이 좋아서 꽁지지, 이제 태어난 지 한 달 됐으니 털이라고 뭐 얼마나 났겠어요? 그래도 그렇지. 꽁지도 아니고 등허리가 다 허옇게 드러났더라니까요. 한 달 됐어도, 이제 어엿한 숙녀인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에요. 저번에 그렇게 지렁이 한 마리 안 뺏기려고 부리로 쪼아대더니 벌 받은 거 아닐까요?”


  박새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능숙하게 오목눈이의 말을 끊었다.


  “에헴. 저도 다 보았습니다. 우리 오서산에 사는 동물이라면 다 들었겠지요.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렁이 얘기는 또 왜 나옵니까?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박새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나 이내 오목눈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평소에도 쉬지 않고 지저귀는 데다가 결국 비뚤어진 결론으로 끌고 가는 오목눈이를 피하는 데 실패했다.


  “어머 어머. 걱정돼서 그러지요. 걱정돼서. 걱정도 못 한답니까? 박새 아저씨는 연민이라는 것도 없나요? 이제 알도 낳고 새끼도 품고해야 하는데 털이 다 빠져 버렸으니 얼마나 흉하겠어요. 소나무 위에 앉아서 보니까 등허리가 햇빛에 비쳐서 아주 눈이 부실 지경이라니까요.”


  박새는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어휴. 간신히 목숨만 붙어서는 저 구석에 숨어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눈이 부신 게 말이 됩니까?”


  오목눈이는 뒤이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이미 박새는 날아오른 뒤였다. 오목눈이는 박새의 꽁무니를 보며 말을 던졌다.


  “어머 어머. 저래서 넥타이 맨 새랑은 대화가 안 된다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렇게 연민이 없어서야 누가 옆에 있고 싶어 하겠어?”


  도랑에서 이마뿔을 다듬던 가재가 한마디 거들었다.


  “지금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옆에 아무도 없는데.”


  오목눈이는 드디어 대화 상대를 찾았다는 듯 도랑 옆 바위로 포로로 날아갔다.


  “누구긴요. 누구라도 들으라고 하는 게 말인데 누구라도 듣겠죠. 아니 글쎄, 간밤에 오골계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가재는 더듬이 자루를 들썩이며 자기 얼굴만 한 돌멩이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오골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렴 염소만 할까요?”


  가재가 들어 올린 돌멩이 위로 거미 한 마리가 잠시 착지했다가 다시 튀어 올라 거미줄을 뽑아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목눈이가 잽싸게 거미를 주둥이로 물었다. 염소가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능이었다. 오목눈이가 식사하는 사이 가재는 큰 바위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오목눈이는 염소가 사는 목장으로 향했다. 가재의 말대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제 새끼를 끔찍이 여기며 몰고 다니던 어미 염소가 보이지 않았다. 배고픈 새끼 염소들이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숫염소는 따라다니는 새끼 염소들이 귀찮은지 한 번씩 뒤로 돌아 뿔로 박는 시늉을 했다. 오목눈이는 목장 이곳저곳을 날며 어미 염소를 찾았다. 어미 염소는 나무판자 아래 구석에 누워 있었다. 목덜미를 물렸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어미 염소는 멀리서 들리는 새끼 염소들의 울음에 한 번씩 괴성을 지르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는지 온몸이 들썩거리며 시계 방향으로 몸이 조금씩 돌아갔다. 오목눈이는 죽은 제 새끼들이 생각났다. 둥지를 덮친 흰개미 떼에 덮여 눈도 한 번 못 떠보고 죽은 새끼들이. 오목눈이는 판자 위에 놓인 베 자루를 보았다. 작은 부리로 힘껏 물었다. 베 자루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목눈이는 조그만 날개를 펼쳐 파닥였다. 혓바닥에 거친 베의 줄기가 파고들었다. 마침내 오목눈이는 베 자루를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염소의 배 위에 베 자루를 덮어 주었다. 염소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딱따구리가 상수리나무를 부리로 쪼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오목눈이는 상수리나무로 다가갔다. 오목눈이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딱따구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목눈이는 그 표정을 못 본 체하며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간밤에 목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떠들고 싶었다. 부리를 벌리자 혓바닥에서 쌉싸름한 베 줄기 냄새가 났다. 오목눈이는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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