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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Apr 28. 2022

냉동 갈치

엄마가 주신 냉동 갈치를 손질했다.

<냉동 갈치>     


2022.03.28



  엄마가 주신 냉동 갈치를 손질했다. 50cm는 족히 넘는 대형 갈치는 어쩌다 내 손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가 누볐을 바다를 생각하니 마음이 애잔해진다. 엄마가 여러 번 알려주셨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는 갈치 손질.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 식탁에 올릴 준비를 한다.


  나무 도마를 꺼내 갈치를 올린다. 갈치가 너무 커서 도마 밖으로 나가므로 밑에 신문지를 깔았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재킷을 걸친 갈치가 나를 쳐다본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만질 수 있겠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노려본다. 나는 이 눈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갈치의 눈을 감겨준다. 키친타월에 물을 적셔 슬그머니 시야를 가린다. 갈치의 도도한 냄새가 코를 후비고 들어온다. 연한 석유 냄새 같은 비릿한 향이 내 뺨을 후린다. 식칼을 꺼내 조기 비늘을 반대 방향으로 슥슥 밀어낸다. 물에 불린 갈치의 은색 때가 후드득후드득 벗겨 나간다. 튀어 오르는 명품 가루가 내 손과 가슴과 얼굴에 묻는다. 자꾸 눈이 감기고 입은 아래로 꺾이고 이를 악물게 된다. 절규하는 신음을 내뱉는다. 신속 정확하게 끝내고 싶지만 갈치는 너무 크고 어리숙한 손놀림에 쉽게 몸을 내어주지 않는다. 머리 부위와 연결된 비늘을 벗겨낼 땐 자꾸 키친타월이 떨어져 나갈 듯 들썩거린다. 어쩔 수 없이 갈치를 한 손으로 붙든다. 그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손을 깨물 것만 같다. 아, 도도한 왕세자 비를 납치한 악당이 된 듯한 이 느낌은 뭘까?



  은박지를 벗겨낸 껌 종이 같이 새하얀 갈치가 가련해 보인다. 더 이상 감정을 느껴서는 곤란하다. 인터넷 선생님을 따라 갈치 머리 옆 부분을 V자로 잘라 내장까지 쭉 빼낸다. 으윽, 눈을 가린 채 풋내기 망나니의 어설픈 칼춤을 받아내는 고고한 갈치여. 내 그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 갈치의 삼단분리에 내 영혼도 같이 떠나간다. 유체 이탈 기법을 쓸 수 있다면 이럴 때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가위를 꺼내 갈치의 휘황찬란한 왕관을 자른다. 험한 바다를 현란하게 누볐을 지느러미가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사각사각, 귓속에 박히는 웅장한 소리. 이어서 나무를 베듯 두툼한 갈치를 토막 낸다. 이제 갈치는 처음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바다 갈치가 아니라 마트 갈치다. 그러나 내가 그를 기억한다. 내 손과 눈이, 내 코와 몸이 한 일이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찡그려지고 뱃속이 뒤집힌다. 내 다리 하나가 들려 다른 쪽 발 위에 걸쳐져 있다. 허리가 자꾸 꺾인다. 손은 갈치를 향했지만, 몸은 반대 방향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아아, 이제 그는 떠나갔다. 



  이제 네 마리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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