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밀한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기
아스팔트 위 부서진 모래가 발 끝에 차여 흩어지는 소리,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나지막이 지저귀는 새소리, 나뭇잎을 건드리는 부드러운 파열음. 비 오는 날 산책을 하다 보면 평소에 잘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행동반경은 좁아지고 우산의 너비만큼 자연스레 사람 간의 거리가 벌어진다. 얼마 전 작은 구둣방에 가서 고쳐 온 우산을 들고, 장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비 냄새를 맡으며 걷는다.
빗방울과 분투하며 몇 번이고 채비를 재점검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나무 사이로 간간이 스미는 햇빛, 길 끝에 홀로 서 있는 나와 노란 우산과 까만 장화. 귀에 이어폰을 꽂지 않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며 할머니 생각을 한다.
아빠는 장남은 아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엄마는 주변에서 어떻게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느냐는 말에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시부모님이 저희를 데리고 사시는 거예요."라며 감탄스러운 답을 하시곤 했다. 그러나 평생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얼마나 녹록지 않은 삶이었을지,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야 엄마의 삶이 달리 보인다.
최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외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혼자 식사 준비며 만날 사람도 없이 지내는 게 외로워서 외할머니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어렵게 면회에 다녀온 엄마는 외할머니 얼굴에 살도 붙고 훨씬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배우자의 엄마는 모시고 살면서 본인의 엄마는 멀리 요양원에 두고 오는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다. 요구되는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온 몇십 년의 세월 동안 정작 엄마의 감정은 무시당하고 이성에 억눌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자, 엄마는 열일 제쳐두고 나와 아이를 보살펴 주었지만 때론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도 했다.
"애기가 알맹이고 너는 껍데기야."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내게 그 말은 가히 충격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멀쩡히 살아있고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껍데기라니. 내 모든 알맹이가 아기에게 갔다니. 심지어 나를 최우선으로 대하던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변방의 쭉정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엄마 스스로 삼키며 살아왔던 말이란 걸 깨달았다. 시부모님 밑에서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아들을 바라는 집에서 딸 세명을 낳는 동안 엄마의 자존감은 얼마나 무참히도 깨졌을까, 심장이 아려왔다. 조부모님은 우리를 업고 다니며 좋은 건 다 챙겨주시려 하셨지만 은연중에라도 엄마는 분명 아들을 낳는 것에 대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 학교가 방학을 하면 짐을 싸들고 고향으로 간다. 시골집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어 하루종일 물놀이를 하고 밭에 나가 방울토마토, 복분자, 체리, 수박 등 각종 열매를 따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아이들은 노릇노릇 익어간다. 남편은 출근해야 해서, 이번 방학에도 아이들만 데리고 시골에 내려갔다. 그런데 장난감을 모아둔 작은 방에 못 보던 보드게임이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발견한 첫째는 얼른 들고 거실로 나왔다. 비닐도 안 뜯은 새 게임이길래 형제들 중 놓고 간 사람이 있는지, 뜯어서 놀아도 되는지 연락을 돌리는 데 주인이 없었다. 아이 장난감을 두고 갈 사람이 없는 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뒤늦게 들어온 엄마가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아, 그거 니네 할머니꺼여. 누가 줬다는 데 지난번에 정민이가 애기 데리고 왔을 때 주더라. 근데 정민이가 애기 어려서 아직 못 논다고 놓고 간겨."
정민이는 큰 아버지댁 아들이다. 아직 아기가 어린데 이런 보드게임을 하라고 줬다니, 믿기지 않았다. 최소 초등학생 이상은 돼야 놀 수 있는 게임이었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되물었다.
"정민 오빠 애기한테 줬다고? 이건 우리 첫째는 돼야 간신히 놀 수 있어 보이는데. 게다가 정민 오빠는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인데 왜 거기에 줬대요?"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그게 바로 손자랑 손녀의 차이인겨. 아무리 매일 보고 같이 살았어도 친손자한테 다 가는 법이여."
엄마의 말에 한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토록 나를 귀여워해주고 우리 아이들을 아껴주던 할머니가 뒤에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촌 오빠의 아기에게 더 애정을 쏟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할머니의 간식과 선물을 따로 챙겨가고 우리 아이들은 증조할머니의 방에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가서 재롱을 피우는데, 나는 실제로 보지도 못한 정민 오빠 아기를 더 챙긴다는 말이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다음 날 아이들이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노인정에 갔다 아이들 곁으로 오셨다. 나는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할머니가 정민 오빠 애기 줬다는 보드게임, 집에 놓고 갔길래 첫째가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당황하실까? 자연스럽게 우리 보고 갖고 놀라고 하실까? 반응을 보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입을 여셨다.
"아이고, 수영하는 거 봐. 돌고래가 따로 없네."
할머니는 가타부타 아무 대답도 없이 전혀 다른 말을 하셨다. 아예 대답도 안 하고 화제를 전환하는 건 당황했을 때 나오는 표현 아닌가. 엄마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감정이 훅 올라왔다. 내가 평생 알고 지내던 할머니를 잃은 기분이었다.
방에 들어와 뒤엉킨 감정의 고리를 정리하고자 애썼다.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마이클 A. 싱어의 책 <상처 받지 않는 영혼 - 내면의 자유를 위한 놓아버리기 연습>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좋아했던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에, 삶이 완전히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ㅡ 놓아 보내라". 할머니가 사촌오빠가 남자란 이유로 더 좋아하고 그 아기를 친손녀로 받아들이며 더 예뻐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변하는 건 없다. 할머니는 여전히 어린 내게 달콤한 곶감을 숨겨놨다 따로 불러 입에 넣어주고,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생선 가시를 하나하나 다 발라내주고, 부침개를 좋아하는 첫째를 위해 더운 여름에 프라이팬에 호박 반죽을 올리는 분이다. 그런 할머니가 보드게임 하나를 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아이들보다 혹은 나보다 사촌 오빠를 더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할머니를 미워하고 덜 사랑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받는 만큼 사랑하고, 다가오는 만큼 다가가고,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일까? 때로는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더 큰 사랑을 주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랑받는 사람이고, 내 존재가 누군가의 사랑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존귀한 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편협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진다. 어쩌면 할머니는 그 보드게임이 뭔지도 모르고 이웃에게 받아 뒀다가 마침 아기가 태어나고 처음 데려온 사촌오빠에게 별생각 없이 건넸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에 대한 설움이 깊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애증이 쌓였을 엄마 입장에서는 그게 날카롭게 다가오고, 그 겹겹이 쌓인 미움이 왜곡되어 분출될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정말로 할머니가 나보다 사촌 오빠를 더 좋아하고 그 아이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무슨 이유에서든 나는 내 가족인 할머니를 사랑하고, 그 추억을 소중히 생각한다. 할머니의 사랑이 분해되어 다른 곳으로 흘러갈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사람으로서 사랑받는 사람이기에 내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사랑을 낭비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나는 낭비하는 사랑을 하며 살길 원한다. 내가 받아왔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많은 사랑은 누군가 내게 이유 없이 주었기 때문에 얻은 것들이다. 내가 이 사랑을 움켜잡고 받기만을 원한다면 내 사랑은 언제나 세 살 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늘 섭섭하고 삐지고 상처받기 쉬운 유리알 같은 사랑 말이다. 오히려 세 살 아기는 금방 잊고 부모를 용서하고 받아주지만, 받은 만큼만 혹은 그보다 더 적게 사랑하겠다고 고집부리면 오히려 나를 망가뜨리고 주변을 힘들게 하며 미성숙한 인간으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낭비하는 사랑을 하며 살기 위해서 나는 엄마의 감정에서 분리되어 '나'로 존재해야 한다. 엄마는 나에게 정말 소중하고 나 또한 많은 사랑을 되갚으며 살고 싶지만, 그러한 감정 때문에 더욱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엄마의 감정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내 감정이 망가질 것이다. 타인의 섭섭함에 매몰되지 않고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이미 이러한 고민을 한 바 있다.
"어떻게 내가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의 타자성 안에서 나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인 '낯선 이'와 관계하는 것이다." 타자성을 강조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자아와 자기의 관계를 깨트려야 하며 나아가 타자조차도 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의 생명과 고유성을 인정하며 '타자의 인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득한다. 나는 이것이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서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경계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에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도 연대와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다.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견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엄마와 할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마음을 표현하는 각기 다른 방식들 속에 오해도 쌓이지만 결국엔 내가 베푸는 것보다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친밀한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기, 오해가 쌓인 관계 속에서 더 사랑하려 애쓰기. 생각의 부정적인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사람이라 다채롭고, 쓰지만 흥겨울 노릇이다.
202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