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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Jun 10. 2023

다 큰 어른, 어느 날 그림일기를 시작했다

나의 하루가 의미없지 않기를

미혼이었을 때 나 혼자만 챙기면 되던 때가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할 일들이 주어지는 역할만큼이나 많아졌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직장에서도 역할이 커지면서 정말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


어느 날, 너무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전 넋을 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무척이나 바쁜 날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 끄듯이 즉각 일을 해치우는 게 급급한 나머지 깊은 생각 없이 그저 했던 것이다. 멍할 뿐이었다.  오늘 도대체 뭘 했지? 분명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머릿속이 텅 빈 느낌.


“나 오늘 너무 바빴어.”

그저 한 마디로 하루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흐릿한 기억 속에 내 하루가 그냥 날아 버리는 느낌이었다. 잘 생각나지 않는 머리를 굴려 가면 아침 기상부터 천천히 필름을 돌려보았다. 글로 적어보니 제법 많은 일들을 해낸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구나.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안개처럼 뿌옆게 흐려져 가는 의식이 아쉬워 하루를 천천히 복기하면 정리한 내용을  처음으로 그림일기를 썼다.


그림일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줄글이 어려워 처음 일상을 표현하는 가장 초보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아이들은 하루 중 기억에 남는 한 장면과 네 다섯줄 되는 네모 칸을 채우며 쓴다. 긴 글을 쓰기 위한 징검다리인 것이다.


나에게 그림일기는 아이들의 그것과 달리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긴 글을 쓰는 것보다 부담이 덜 되어 감정표현이 서툰 나를 조금을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하루를 보내면서 겪은 일에 대한 나의 감정을 표정으로 그리고 간단히 설명을 썼다. 간단한 일과 관련된 일러스트도 그렸다. 다 그리고 보니 나의 하루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나의 감정과 느낌을 좀 더 담을 수 있어서 나를 돌아보는 느낌이었다. 드로잉북 한 페이지가 꽉 차도록 열심히 하루를 산 내가 기특했던 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이후로 가끔 그림일기를 그렸다. 특히 정신없는 하루일수록 그림일기로 표현하고 싶었다. 글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는 더 편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가벼운 그림으로 하루를 남겼다. 아침 6시 기상부터 가족들 아침식사 준비에 정신없는 모습도 그리고 5명의 가족답게 쏟아지는 빨래더미를 그리기도 했다. 어느 결에 슈퍼우먼처럼 집안일을 해내는 나의 모습도 대견하게 그렸다. 정신없는 학교일도 그리고 연수의 소감을 간단히 표현하기도 했다.


열심히 산 하루를 그린 그림일기를 나중에 보면 나의 일상이 소중해진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일상을 곱게 보관하는 기분이었다.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이 아닌 열심히 산 흔적이었다.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다 큰 어른의 그림일기는 그렇게 쌓여갔다. 직관적인 하루를 그리면서 열심히 산 나에게 수고했다는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한 신문사에서는 ‘방학숙제도 아닌데, 그림일기 쓰는 어른들이 나타났다’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썼다. 일상을 그림일기로 표현하기도 하고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쓰기도 한다. 최근 SNS 활동이 활발하면서 어른들의 그림일기도 심심치 않게 많이 게시물이 많다고 한다.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미처 챙기지 못한 감정을 추스르고 정리하는 방법으로 그림일기가 제격이라는 기사였다.


그리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느끼는 감정만큼은 같았다. 시간을 들여 그리는 동안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쌓이는 일상을 보며 성취감도 느낀다. 그렇게 채워지는 그림일기가 나의 일상을 충만하게 하고 그렇게 내 삶이 귀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일상을 소중하게 돌아보며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되지 않는 감정으로 나만의 예술을 만들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거의 10여년 동안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우스개 소리로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라진 시간들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이 있긴 하지만 순간 순간마다 내가 일상을 힘겹게 버텨왔던 일, 그 때의 생각이나 감정들은 남기지 않으니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몇 년간의 내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드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시노다 과장의 삼시 세끼’와 ‘샐러리맨 시노다 부장의 식사일지’라는 책으로 유명한 시노다 나오키씨는 990년부터 28년동아 자신이 먹은 매 끼를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 그림식사일기를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이 그림기록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치면서 가치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특별해졌다. 그 기록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화제가 되었다.


내 일상의 기억이 허무해지지 않도록 나는 요즘에도 그림일기를 그린다. 펜으로만 했던 그림이 수채화물감을 만나면서 좀더 다채로워진 표현을 하기도 한다. 때론 붓펜 하나만 가지고 생각의 흐름대로 슥슥 그려나간다. 딸의 친구들이 놀러와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던 일도,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아침 저녁으로 다녔던 기쁨도,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고단했던 하루도 모두모두 그림일기에 담았다. 그리고 열심히 산 오늘 하루도 스스로를 토닥이며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일상은 이렇게소소하고 반복적이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을 뿐, 그저 일상이라고 가볍게 치부한 것들이 돌아보고 소중하게 쌓으면서 의미있는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좀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그림일기이다. 그림일기를 그리면서 나의 일상을 소중하게 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쌓인 그림을 보며 내 삶이 나름 충만했음을 위로받는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림을 못 그려도 의미가 있다. 보편적이진 않더라도 우선 그리는 내가 아니까. 나에게 의미있는 기록이니까.


하루를 정리하고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그림일기를 한 번 써보는 건 어떨까? 아니, 자신의 일상과 삶을 평범함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떤 것이더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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