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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거래빗 Jul 27. 2024

소소한 찻집

이상한 주인장 에이든

금요일 밤_야근을 끝내고 나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 정문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천둥 번개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들렸다.


후두둑 후두둑_


'우산도 없는데...'


그냥 맞고 가기에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회사 정문 앞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일 밖에는 딱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맞은편 시계탑의 바늘이 정확히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이상 서있으니 간간히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이 뜸해졌고, 주변의 상점들도 하나둘씩 불이 꺼지면서 검푸른 하늘이 더 짙어졌다.


"흠..."


얼마전에 새로 산 정장과 구두가 젖을 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_건너편 편의점에 가서 우산이라도 사서 쓰는게 낫겠다 싶어서 가방으로 머리를 대충 가린 채 달려갔다. 운이 좋게도 횡단보도 앞에서 바로 초록불로 바뀌었고, 편의점 정문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우산이 걸려있는 곳을 찾고 있는데 우산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산이 텅텅 비어있는게 아닌가. 다행히 일회용 우비라도 있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샀다. 산다 해도 100% 어딘가에 쳐박혀 있을게 뻔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비를 입고 밖으로 나와서 점점 빗물이 스며들어 가는 구두를 신고서 빗속을 걸었다. 회사와 집의 위치는 버스를 타기에는 가깝고 그렇다고 걷기에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종종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그날은 빗속을 뚫고 자전거를 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문득 어짜피 이렇게 된거 실컷 비나 맞아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가던 갈래길이 나오는 순간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늘 회사와 집만 오갔고 절대로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규칙이란 것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고, 남들이 흔하게 겪는다는 성장통도 가볍게 지나갔다. 한마디로 좀 지루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그 일탈에 약간의 짜릿함도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불꺼진 상점들과 주택가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빗줄기가 너무 굵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간판에 찻잔 모양 엘이디 조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찻집인게 분명했다. 잰 걸음으로 찻집을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빗줄기는 잦아들 생각이 없었고 천둥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마자 은은한 불빛 아래 가게 안이 훤히 보였는데 너무 따뜻해 보여서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카페 중앙에 있는 난로가 어서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딸랑딸랑_찻집 문에 달린 풍경에서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에서 나는듯한 작고 귀여운 소리가 났다. 문이 닫히고 잠시 멈칫하며 서있는데, 주인장보다 먼저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서 내 다리 주변을 훓고 뱅뱅 돌았다. 그런 고양이는 처음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엄청나게 친한척을 했다. 녀석은 개냥이라고 할 정도로 낯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발랑 뒤집어져서 자기의 배를 보여주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보통의 고양이들은 배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지 는다데, 그 고양이는 달랐다. 잠시 뒤에 주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저런...비에 흠뻑 젖었네요~이리와서 좀 앉아요..."


늦가을이라 그런지 빗물에 젖은 몸이 한기로 덜덜 떨렸다. 우비를 입었지만 3분의 1이상이 젖어 있었고 구두는 물에 빠진 것처럼 축축해졌다.


"잠깐 실례할게요."


주인장은 뒤에서 커다란 담요를 펼치더니 내 몸 전체를 돌돌 말듯이 감쌌다. 체구가 큰 사람이 뒤에 떡하니 버티고서서 백허그 자세가 되어있으니 순간 온몸이 경직됐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인가 싶 정도로 뒤에만 서있는데도 등쪽이 따뜻해졌다. 그러고는 젖은 구두 대신 신을 털신을 살포시 내 발 앞에 놓아 주었다. 털이 북실북실하고 회색에 방울이 달려 있어서 고양이와 세트인가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나는 젖은 발로 털신을 신는게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젖은 구두를 벗고 얼른 털신으로 갈아신었다. 부드러운 촉감에 금새 기분까지 뽀송뽀송해졌다. 마법에 걸린 건가.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요~ 따뜻한 핫초코 괜찮죠? 난로 불 좀 쬐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무 장작 몇개를 주워서 난로 속에 더 넣었다. 동작 하나 하나가 배려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섬세하고 따뜻했다.


"감..사...하믕니다..."


늦가을 갑작스레 내린 비로 입이 얼었는지 말소리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장 덕분에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추위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주인장은 딱봐도 외국사람 같았다. 금발인데 살짝 곱슬머리에 머리카락이 커트머리보단 조금 길었고, 푸른 눈에 피부가 버건디 톤의 짙은 구릿빛이었다. 그냥 아무 무늬도 없는 검정 티셔츠를 입었는데, 티셔츠 사이로 식스팩이 보일 정도로 근육질 몸이었다. 거기에다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미남이 이렇게 떡하니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올해로 스물 아홉_남자친구도 한번 사귀어 본적 없던 내가 드디어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로 가슴이 떨리는 남자를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는데, 손님이 마음에 들었나봐요~"


"..................."


할 말을 잃었다. 심장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주인장은 나무로 된 쟁반에 핫초코 한잔을 만들어왔다. 핫초코 옆에는 은색 포장지에 쌓인 초콜릿도 놓여 있었다. 마침 달달한 간식이 먹고 싶었는데, 속마음을 다 들킨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관찰하듯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구도 이렇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 적은 없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요. 오늘은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와줘서 너무 좋네요...난 에이든이라고 해요...나에게 이름을 말해줘도 될까요?"


"음...저는...이경이에요..."


"이경이...너무 예쁜 이름이네요...이경이..."


"..............."


"나는 아일랜드에서 왔어요...한국으로 여행왔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서 남게 됐어요...그게 벌써 10년 전이네요...올해로 서른 아홉이니까...한국은 정말 매력적인 나라예요."


"아일랜드...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바람을 좋아해서..."


"바람도 비도 많은 곳이죠...조만간 고향에 가려고 했는데...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네?"


순간 놀라서 헛기침이 나왔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는 말에 너무 놀랐다.


"내가 놀라게 했나 보네요..."


"음...그게 좀...솔직히 당황했어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고향에 같이 가자고 하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마음속에서는 '같아 가~'라고 소리치는지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저...그럼...정말 같이 가도 될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다 보니_찻집 주인장 에이든과 아일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아일랜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안쓰던 연차를 몰아서 쓰고, 공휴일과 이어서 5일 간의 꿀맛 같은 휴가를 얻어냈다. 물론 한참 프로젝트로 바쁜 동료들이나 상사에게 눈치는 보였으나 그런 것 쯤은 다 잊기로 했다. 번아웃이 올 정도로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짐도 정말 간소하게 챙겼다. 비로 젖을 것 같아서 장화와 우비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들 몇벌 정도만 배낭에 담았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떠나고 싶었다.


"이경~ 준비됐어요? 아일랜드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요~ 아마 다시 돌아가기 싫어질 걸요~"





헬싱키 공항을 경유하고 3시간 넘게 더 가서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유쾌한 에이든과 함께여서 그런지 시간이 2배속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공항에 내리자 마자 에이든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되어서 너무 편안했다. 아무런 계획없이 왔지만 에이든은 아무 염려 말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에이든이 옆에 있으니 너무 든든했다. 나는 에이든이 이끄는 대로 버스를 타고 모허절벽으로 향했다. 에이든의 집은 모허절벽에서 걸어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다. 모허절벽은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언제 꼭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었는데, 심장이 멎을 정도로 멋진 남자와 함께 모허 절벽에 간다니 믿을 수없었다. 마치 내가 영화 '프로포즈 데이'의 한장면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프로포즈 데이는 내가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다.


아일랜드는 참 이상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버스시간이 있었지만 버스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먼저 출발을 했다. 에이든 없이 혼자 왔었다면 버스만 기다리다 여기에 아예 오지도 못했겠다 싶었다. 에이든과 수다 떨면서 가니까 2시간 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거봐요~ 내가 놀랄 거라고 했죠?"


눈물이 흘렀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는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부터 워커홀릭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닐 정도로 일만 했다.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못했고, 가족들과의 모임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피곤에 절어 있었다. 여행같은 건 꿈도 못꿨는데, 내가 모허절벽에 서있다니!


"이거라도 괜찮으면..."


에이든이 주머니를 뒤지는 것 같더니 자기 팔뚝을 내밀었다. 나는 에이든의 재치에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다. 에이든은 정말 자기 어깨에 잠시 기대도 좋다는 뜻으로 어깨를 내밀었다. 나는 슬며시 에이든의 어깨에 기댔고,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한팔로 감쌌다. 그렇게 한참동안 모허절벽의 눈부신 절경을 바라봤다.


"좀더 있고 싶지만 곧 어두워 질거예요~ 이제 우리...집으로 갈까요?"


"그래요...나 너무 미워졌죠?"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지금이 더 예뻐요...안고 싶을 정도로...흡..."


에이든은 어쩌면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상상이 안되었다. 에이든의 한마디에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이미 난 에이든에게 마음 한켠을 빼앗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늘 정해진 궤도만 돌았던 내게 에이든이 나타나고 나서 매일이 새로움으로 가득해졌다. 외국인을 남자로 느끼고 좋아하리라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에이든을 만나고 나서 그런 생각들이 산산히 부서졌다. 에이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렇게 매력적인 남자를 두고 사랑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에이든...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 내가 예뻐진 거 같잖아요. 훗~"


"정말인데...나 빈말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이런말 해본 사람은 첫사랑 이후 처음이고..."


"첫사랑요?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에이든~"


에이든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는듯 하더니 수줍게 말을 꺼냈다.


"음...내가 아홉살때 프랑스에서 온 마리옹이란 아이였어요. 지금도 그 아이 눈을 잊을 수가 없어요. 눈이 정말 예뻤거든요."


순간 질투가 났다.


"설마~~~다시 만나고 싶은건 아니죠?"


"에휴~~~마리옹은 얼마 전에 내 친구 리암하고 결혼했는 걸요? 동네 소꿉친구로 항상 몰려다녔는데, 어느 순간 리암하고 눈이 맞았지 뭐예요? 순식간에..."


"앗~~~정말요? 에이든은 그 뒤론 여자친구 없었어요?"


나는 은근슬쩍 에이든에게 여자친구가 없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핑계일수도 있지만...찻집을 시작하고 계속 정신이 없었어요..."


에이든과 순간 눈이 마주쳤고,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에이든은 내 눈을 계속 보고 또 봤다. 그러고 나서 확신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남자와 손을 잡아보는게 처음이라서 그런지 너무 떨렸다. 손이 점점 축축해 지는게 느껴졌지만 에이든은 게의치 않고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이경~ 지금 얼굴 엄청 빨개졌어요~"


"손잡아보는 거 처음이에요..."


"이경~나도 사실은...심장이 너무 뛰어요...이렇게 하는게 좋겠어요...자 나를 봐요~"


에이든은 내 얼굴을 감싸쥐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따뜻하던지 온몸이 녹아내렸다. 그 상태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경~ 이경이 나와 만나려면 심장이 두개쯤은 있어야 겠는데요? 하하하~"


"지금 나 놀리는 거예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긴장을 심하게 하고 쓰러진 적이 두세번 된다.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도 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신경정신과로 연계돼서 상담을 받았는데, 몸이 너무 과긴장 상태오래 놓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면서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약통을 늘 챙기고 다녔고, 인지행동치료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집단으로 모이는 자조모임도 다녔다.


"이경~ 참 소개가 늦었네요. 마이 맘이에요~"


"반가워요~ 에이든 통해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얼굴이 많이 창백하네요. 아이리쉬 스튜를 좀 만들어 봤어요. 좀 들어요~에이든...잘 챙겨주렴~"



창가쪽 테이블에 스튜 두접시가 놓여 있었다. 에이든은 배려가 몸에 밴듯 내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창밖 너머로 어렴풋이 모허절벽이 보였다. 이런 곳에 산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라면 이런 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좀 산뜻해지고 싶었어요. ㅎㅎㅎ"


"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훗~ 스프가 너무 맛있어요~"


"우리 마미 음식 솜씨는 이 동네에서도 알아줘요~어서 들어요~"


에이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너무 편안했다. 러그나 담요처럼 에이든의 존재는 나에게 너무 따뜻했고, 포근했다. 순간 또 울컥했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행복했다.


"에이든...나 아무래도 또..."


"한국말에 그...그런 말이 있는데...아~ 맞다~ 울보...ㅎㅎㅎ"


"놀리지 마요~ ㅎㅎㅎ(훌쩍)"


"이경~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요~ 난 이런 이경의 솔직한 모습이 너무 좋아요~"


에이든은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감싸쥐면서 미소지었다. 손의 온도는 봄 햇살처럼 따스했고, 에이든의 눈빛은 여름태양처럼 뜨거웠다. 그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내일 모허절벽에 다시 갈래요?"


"좋아요!"


접시에 수북히 담긴 스프를 다 먹어치우고, 욕조에 몸을 풍덩 담그고 나서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을 청했다. 낯선 방 침대에 누워있는데도 피곤했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늦잠꾸러기 아가씨 어서 일어나요~같이 모허절벽에 가요~담요와 먹을거리 좀 챙겨봤어요~마미는 아침 일찍 약속이 있어서 나갔고, 우린 모허절벽에 갔다가 오후에는 마미랑 티타임 가져요~ 괜찮죠?"


"네~좋아요..."


기지개를 켜고,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에이든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아랫층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러고 보니 아랫층을 통과해서 위층에 먼저 와있었다. 아랫층에는 주방공간과 거실이 있었는데, 잔잔한 꽃무늬로 된 연녹색 벽지가 어우러져서 패브릭으로 된 소파와 아이보리색 러그가 하나가 된듯 조화를 이뤘다. 전체적으로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에이든의 느낌과 너무 비슷했다. 거실 중앙 벽에 작은 벽난로가 있어서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에이든~ 집이 너무 예뻐요~"


"그랜파와 그랜마가 지은 집이에요. 작년에 일부 리모델링을 하긴 했지만 그랜파와 그랜마의 손길과 애정이 담겨 있어요~"


"사진을 좀 찍어도 돼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서...지금 살고 있는 집에 그대로 옮겨두고 싶을 정도예요~"


"얼마든지요~ 나도 배경에 넣어줄까요? 훗~"


"그것보단 에이든하고도 같이 찍고 싶네요~"


"이리와봐요~"


에이든은 창가쪽 소파에 같이 앉자는 포즈를 했다. 에이든과 밀착되어 있으려니 심장이 두배 이상 뛰었다. 또 기절하면 안되니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쉼호흡을 두어번 넘게 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에이든이 볼에 입맞춤했다. 내가 순간 놀라 에이든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이번엔 입술에 입맞춤했다. 그 다음엔 내 얼굴을 감싸쥐고 부드럽게 하지만 깊이 더 깊이 내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에이든~ 숨이 막힐 것 같아요...잠시..."


에이든은 아쉬운듯 한번 더 입맞추고 한팔로 나를 감싸안았다.


"이런 감정 처음이에요. 이경...난...이경에게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고 있어요. 멈출 수가 없어요..."


"잠시만요..."


"괜찮아요? 이경?"


"네...이제 좀 안정이 됐어요...가슴이 두근거릴 때면 좀 그래요...여기에 고개를 대 볼래요?"


"와...이경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고 있네요...이리 와봐요...소리를 들어봐요..."


에이든의 심장도 엄청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예요~"


에이든의 품에 안겨있으니 그 품이 너무 포근하게 느껴졌고, 요동치던 심장도 차츰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갈까요?"


에이든의 손을 잡고 모허절벽까지 걸어갔다. 다시 보는 풍경인데도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에이든은 뒤에서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에이든의 너른 품에 안겨있으니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성난 파도와 바람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돗자리를 펴고 에이든이 준비한 홍차와 쿠키를 먹었다. 에이든은 시선이 뜨거울 정도로 계속 나를 쳐다봤다.


"에이든...이렇게 에이든에게 빠져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우린 만난지 얼마 안됐고, 아직 서로를

너무 모르잖아요."


"이경~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나도 이토록 누군가에게 끌려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좀 조마조마해요. 당신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봐 두려워요."


에이든의 눈을 보니 그의 진심이 쏟아져 나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늘 혼자였는데 에이든과 함께 하는 하루 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하고 감미로웠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오후의 티타임_에이든의 마미 브리짓은 오후의 티타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그녀에게 다가가 도울게 없는지 살폈다. 브리짓은 그걸 눈치챈듯 조심스레 테이블에 쿠키를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브리짓과 에이든에게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다.


브리짓은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트가 담겨있었다.


"이경~에이든이 누굴 데려온 건 처음이에요. 물론 친구들이야 수시로 드나들었죠~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군가를 데려온 건 '처음'이란 얘기예요~"


"..................."


순간 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경~체리색처럼 물들었네요~에이든 잘 부탁해요~한국생활이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에이든은 다정한 눈빛으로 계속 나를 바라봤다. 에이든의 눈빛에는 모든 말이 들어 있었다.


"음...쿠키가 너무 맛있어요. 홍차도..."


"그건~말 안해도 알아요~~~훗~"


브리짓의 그 한마디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브리짓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이든에게 이런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유년시절이 그려졌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영국신사라고 할 정도로 멋진 분이 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왔다. 브리짓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품에 안겼다.


"여보~보고 싶었어요~"


둘은 오랫동안 포옹을 나누고 키스했다.


"이경~난 크면서 저런 장면을 늘 봤어야 했어요~한국말로 닭살이라고 하죠?ㅎㅎㅎ"


"에이든~부러워요~우리 부모님은 좀체로 표현을 안하는 편이라서요~서로에게...나한테는 엄청나게 차고 넘치게 주지만...ㅎㅎㅎ"


"(귓속말로)아마도 파파 마미는 침실로 갈 것 같아요~ㅎㅎㅎ우린 이층으로 올라가죠~"


딱봐도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 저렇게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경외심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너무 부러웠다.


층 에이든의 방_우리들은 조금 어색한 기류를 느꼈다. 방안에 있는데 공기가 많이 더웠다.


"이경~ 좀 긴장한 것 같네요~ 음악 들을래요?"


"음...이거 레코드 들어도 돼요?"


벽장 한켠에 테이블과 턴테이블이 있었다. 레코드판이 꽤 많았는데,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있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바로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방안 가득 음악이 울려퍼지고 에이든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춤을 부드럽게 끌어 당겨 안고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했다.


"난....춤은 못추는데...."


"괜찮아요...내가 이끄는 대로 그냥 따라 오면 돼요..."


어느새 나는 에이든의 리듬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에이든과 하나가 되어 방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음악에 취했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에이든은 내 입술에 이번엔 좀 더 뜨겁게 키스했다. 첫키스의 어색함을 지나 이제는 서로가 하나가 된 듯 자연스러웠고, 그의 입술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자꾸만 그의 좀더 깊숙한 곳을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도 그걸 감지했는지 좀더 바짝 내 몸을 끌어당겼다. 나는 순간 좀 두려웠지만 그냥 그가 하는대로 모든걸 내맡겼다. 눈이 스르륵 감겼고, 우리는 천천히 하나가 되었다.





"이경~사랑해요."


나는 대답대신 그의 품에 더 깊숙히 파고 들었다. 그는 더욱 힘주어 나를 감쌌고,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촉촉한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을때 느낌이 간지러우면서도 너무 좋았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나고,


어느 비오는 날 밤 그날도 어김없이 찻집에 갔다. 그런데 문은 열려있는데 안이 너무 캄캄했다. 아무 인기척이 없어서 혹시 도둑이 들었나 착각이 들정도였다. 나는 에이든을 부르면서 한손에는 주변에 뭔가 도구라도 없나 살폈다. 다행히 우산꽂이에 장우산이 들어있어서 우산을 조심스레 움켜쥐고, 앞으로 걸음씩 나아갔다. 숨쉬는 것조차 소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주방쪽에서 갑자기 작은 불빛이 보이더니 그 불빛이 점점 더 커졌다. 어둠속에서 에이든의 장난스런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의 손에는 케익이 들려 있었다.


작은 웨딩케이크였다. 순백의 생크림케이크 위에 숲과 작은 오두막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 케익의 중앙에는 다이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경~ 좀 성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이경과 매일 함께 눈뜨고 싶고, 매일 밤 이경을 뜨겁게 안고 싶어. 이경을 너무 사랑해. 나랑 결혼해줘. 평생 웃게 해줄게."


눈물이 났다. 또 바보같이...


에이든은 내 눈에 입맞추고 나서 무릎을 꿇고, 반지를 들어 청혼을 받아달라고 한번 더 말했다.


"에이든~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해요.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거예요."


에이든은 내 손에 반지를 껴주고, 나를 안고 계속 빙글빙글 돌고나서 뜨겁게 키스했다. 우리는 웨딩마치를 했고, 그리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구릿빛 피부의 근육질 남자가 상체를 드러내고, 뜨겁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에이든과의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이경~사랑해~"




에이든의 구릿빛 피부와 이경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에이든은 이경을 번쩍 들어안아 해변을 따라 사라졌다. 파도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에필로그-


어느 날, 찻집문을 열고 비에 흠뻑 젖은 한 여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노란색 우비 속에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도 잘 못마주치고 볼이 발그레지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고, 3초간의 정적으로도 그녀에게 블랙홀처럼 빨려들었다. 나는 그녀와의 첫만남부터 영원을 꿈꿨다. 때는 이때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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