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이나 먹고 언제 시집갈래?"
"아빠~ 나이 서른이 뭐가 많아?"
출근 준비도 바빠 죽겠는데, 아빠는 어김없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결혼 소리에 귀가 곪아터질 지경이다.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아침밥을 대충 쳐다보기만 하고, 서둘러 출근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게 상책이다.
"저!저~~~아침먹고 가야지~!!!"
문을 닫고 나오자 마자 잔소리가 음소거가 되듯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뿐해졌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중턱에 성큼 발을 내밀고, 하늘은 더 높고 푸르르고 오색빛깔로 물든 나뭇잎들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며 뽐내는 가을날의 아침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아빠의 잔소리만 없다면!
"아니 대체 인생의 종착역이 결혼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구헌날 결혼 타령이람~으휴~"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차에 키를 꽂았다. 나는 변호사다. 그동안 정말 눈코 뜰새 없이 숨가쁘게 살아왔다. 학교 다닐 때는 부족한 학비를 충당해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밤샘 공부까지 했다. 어떤 날은 현기증이 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적도 있다. 그러니 당연히 연애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사법고시 패스를 위해 1평자리 고시원에 들어가서 1년 넘게 나오지 않았고, 공부 시간 말고는 낭비라고 생각해서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대충 떼우면서 정말 치열하게 공부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릴적부터 반복을 싫어했다. 고통은 한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난 사법고시 '첫회' 시험에 합격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시험 합격 소식을 안고 아빠의 분식집까지 숨이 차도록 달려갔다. 아빠는 떡볶이를 만들고 있다가 나의 합격소식을 듣자 마자 밖으로 나가 국자를 들고 뛰면서 사람들에게 시험합격 소식을 알리고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나를 안고 셀 수 없이 빙그르르 돌았다.
"우리 딸 장하다."
그 말 한마디로 그간의 고통이나 힘듦이 싹 날아갔다. 그렇게 힘들게 사법고시에 붙었고, 판검사보다는 원래부터 꿈꿔왔던 로펌에 들어갔다. 파트너 변호사는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한수완 변호사님이었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최고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변호사의 혜택같은 거였다. 한수완 변호사님을 처음 대면했을 때 변호사님이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좋은 변호사란 어떤 변호사라고 생각하나요?"
"음...저는 의뢰인에게 어떤게 최선인지 고민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내는게 좋은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지...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어요...그 최선이 정말 의뢰인에게 최선일까...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변호인이 생각하는 최선이 과연 의뢰인에게도 최선일지..."
한수완 변호사님은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으신 분이고, 높은 수임료를 받고 있지만 늘 겸손한 분이시다. 또한 수임료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분들에게는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주시고 함께 고민하신다. 그리고 가장 멋진 면은 로펌의 대표이면서도 항상 자세를 낮추고 동료자적인 마인드로 로펌식구들과 격의없이 지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어떻게 변호사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해에 'SW로펌'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인재들만해도 수도 없다.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내가 저런 분 밑에서 일한다니...'
출근할 때마다 그런 생각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대형로펌이라 일이 많고, 밤늦게 까지 서류 검토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변호사님과 함께라면 너무나도 일이 즐겁다.
"오늘은 사건 조사차 출장을 가야 되니 이따가 점심먹고 같이 출발하죠~"
원래 파트너 변호사님들은 출장을 잘 나가지 않으시고, 신입 변호사들에게 맡기는데 한수완 변호사님은 역시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변호사님과 함께 출장이라니 신이 나기도 했고, 한편으론 너무 떨렸다. 단 둘이 차를 타고 출장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까아아
점심식사를 대충 먹고 나서 서둘러 준비한 서류들을 서류가방에 챙기고 나서 변호사님 뒤를 따랐다.
"거기 타요. 차 안이 좀 어수선하긴 한데 대충 밀고 타요."
예상외였다. 말쑥한 인상에 늘 깔끔하셔서 차 안에도 먼지 한톨 없을 줄 알았는데, 간식봉지며 음료수 캔등이 굴러다니는 차안을 보고 있으니 놀라웠다. 예상외의 반전이랄까. 이런 인간적인 면에 변호사님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올라갔다.
"좀 지저분하죠? 하하 저기...뒤에 종이 가방 좀 한번 볼래요?"
뒷자석에 종이가방 하나가 있었고, 앞쪽으로 끌어당겨서 안을 살펴봤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제가 간식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와~ 이거 다 제가 좋아하는 건데~ "
종이가방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던 간식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음...그런 건 약간의 관찰력만 있으면 다 알 수 있는 건데...? 평소에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먹는 거 봤어요."
"앗...하하하 제가 너무 먹어댔나요? 핫하하"
"난 오히려 귀엽던데..."
"..........................."
순간 정적이 흘렀고, 변호사님은 혹시라도 내가 어색하지 않게 음악을 틀었다.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는데, 간식을 먹으면서 커피도 마시고 재즈음악을 듣고 있으니 움직이는 카페와 흡사했다.
"가을 변호사님, 간식 진짜 좋아하나 보네요. 사실 나도 일하다 보면 당 떨어지는 걸 느껴요. 업무량도 많고...변호사라는 직업이 엄청 럭셔리한 직업인 것 같아도 알고보면 막노동이에요. 하하"
"그런가요? 저는 그래도 지금이 좋아요. 학교 다닐때 아르바이트 하면서 밤샘 공부할 때에 비하면 지금 너무 행복해요."
"와~ 가을 변호사님~ 대단하네요~ 난 사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라 편하게 공부만 해도 힘들었는데, 아르바이트 병행이라니 상상하기가 힘드네요~"
"변호사님~저도 금수저라면 금수접니다~저희 아빠는 분식집 사장님인데, 그 분식집이 맛집이라고 소문나서 줄서서 먹는 맛집이 됐어요~핫하하하 저희 동네에서 가장 핫할걸요? 후훗"
"와~ 내가 분식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 언제 가을 변호사님 아버님 분식집에 한번 초대해 주세요~꼭~!"
출장지에 도착했다.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당장이라도 파도에 몸을 싣고 싶어졌다. 하지만 본분을 잃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의뢰인은 속초해수욕장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의뢰인은 오늘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었고, 반복되는 폭행으로 심신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전화로 의뢰를 받았고, 경찰 동행 하에 현장조사를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가을 변호사입니다. 결정하시기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용기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의뢰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으로까지 만들 수 있는지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끌어올랐다. 도대체 아내를 저렇게 때리는 작자는 어떤 정신 상태인건가. 저렇게 청아하고 고운 얼굴에 푸른 멍이 들게 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역 몇년은 받아내고 싶었고, 의뢰인을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올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증거수집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가해자 남편이 현재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의뢰인은 두려움에 떠는 듯 보였다.
"그 사람이 혹시라도..."
경찰은 지원 병력을 한명 더 늘리겠다고 했고, cctv도 한번 더 점검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괴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변호사를 하면서 온갖 쓰레기들을 다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 한 구석이 헛헛해졌다. 하지만 힘을 내서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겠다고 한번 더 다짐했다. 이 세상 쓰레기들을 다 쓸어버리자!
현장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_차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눈치도 없이 나는 소리에 배를 움켜쥐었다. 변호사님은 그 상황이 웃겼는지 애써 웃음을 참는 듯 했다.
"가을 변호사님~우리 저기서 밥먹고 갈까요?"
길모퉁이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30년 전통 진한 육수로 우려낸 국물에 수제 순대를 얹은 순대국밥집이라는 현수막이 떡하니 걸려있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기본반찬과 물이 나왔고, 몇분 기다리니 바로 순대국밥이 나왔다. 그리고 국밥에 밥이 아예 말아져서 나왔다.
"어서 들어요~"
"잘 먹겠습니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그리고 제가 순대국밥 킬러라는 거 말씀드렸던가요? 하하"
"아~ 그래요? 나도 순대국밥 킬러인데, 내가 자주 가는 집이 있는데 언제 한번 데려갈게요~그럼~그집만큼 맛있는 집은 없을걸요?"
30년 전통이라고 쓰여있어도 맛없는 집도 있는데 이 집은 달랐다. 우유 빛깔 진한 국물은 너무나도 고소하고 풍미가 살아있었고, 순대와 머릿고기 그리고 내장은 잡내가 하나도 없이 깔끔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기본반찬으로 나온 겉절이는 적당히 매콤하고 아삭아삭한게 입맛을 한층 더 돋웠다. 군더더기 없이 훌륭한 식사였다.
"최가을 변호사~ 누가 안잡아가니까 천천히 먹어요~"
한수완 변호사님은 내가 입안이 터져라 먹는 모습을 보면서 연신 아빠 미소를 지었다.
"(우걱우걱) 변호사니응음 안드세요...?"
"나는 원래가 양이 좀 적은 편이라 배부르네요~ 이거 덜어 먹은 거니까 더 먹을래요?"
나는 변호사님이 남긴 것 까지 다 비우고서야 허기가 꺼졌다. 이렇게 맛있는 순대국밥집을 만난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우연히 들른 곳인데, 기분좋은 포만감을 안고 식당을 나섰다.
"저기...자판기에 커피도 있는데 한잔 마시고 갈까요?"
"네~ 좋아요~ 커피는 역시 식당 커피죠~훗~"
달달하고 진한 커피에 아드레날린이 상승했다. 오후가 되면서 산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저 멀리서 붉은 노을이 어린아이의 발그레진 볼처럼 수줍게 빛났다.
"흠..흠.....저...최 가을 변호사?...흠..."
"헉~ 제가 잠들었었나요???....으으윽~~~"
"오늘은 밤샘근무 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요~이건 명령입니다."
"넵~변호사님~ 낼 봬요~으아아악~~~"
손목시계는 벌써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두정거장 거리. 분식집 위층이 우리집이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침대로 바로 직행했다. 그러곤 눕자 마자 바로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헉~~~늦었다~~~!!!"
까치집이 지어져 버린 머리카락을 대충 누르면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때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가을~~~오늘 토요일이야~~~"
'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
다시 침대로 직행해서 또 자려는데, 잠이 달아나 버려서 휴대폰 화면을 켜니 문자가 한통 와있었다.
(야~ 최가을~ 오늘 날씨도 좋은데, 놀러 갈까? 북촌가자~~~)
여름이의 문자였다. 여름이는 초등학교때부터 친구다. 여름이는 시골에서 전학왔는데도 금새 아이들하고 친해질 정도로 성격이 좋은 아이였다. 그리고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게 없는 아이였다. 소위 '인싸'였다고 해야 하나? 그에 비해 나는 조용하고, 공부만 파고드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여름이와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하다. 어느 날 방과 후 여름이가 자기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 잡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행동을 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나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게 안닌가. 여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이렇게 말했다.
"야~ 최가을~ 너를 내 친구로 임명하노라~"
엑? 쟨 뭐지?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지금까지 친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여름이는 내 몸의 일부분이나 마찬가지다. 여름이는 작년 겨울 웨딩마치를 올리고 지금은 뱃속에 아이가 있다. 곧 만삭이 되려고 부푼 배를 안고도 에너지가 나보다 더 넘치는 것 같다. 어쩜 저렇게 체력이 좋은 거지? 놀랍다.
"임신 7개월인거 맞지? 나보다 더 쌩쌩해서 가끔 착각이 들 정도다~"
"결혼도 하기 전에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떡할래? 이그 쯔쯔~ 그리고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야지~칭구~"
"너까지 그러기냐~? 아빠가 하는 잔소리에도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제발 그만~"
"아부지가 좀 답답했으면 그랬겠냐? 남들 흔히 하는 연애 한번을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냐?
연애라도 해라~ 그럼~~~제발~~~"
"연애는 선택이라고~결혼도 선택이고~ 그리고 난 이대로도 좋다고~ 그 골치 아픈 거 해서 뭐하냐?"
"이그 결혼 선배로서 얘기해줄까?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이미 나 어른이거든???"
"이그~ 말이나 못하면~~~ 그건 그렇고 오늘은 진짜 매운거 땡긴다~~~마라탕 어때?"
"야~ 임산부가 그렇게 자극적인 음식 먹어도 돼?"
"그럼~ 먹고 싶은거 먹어야 아기도 행복하거든? 하하"
마라탕집_재료바구니에 원하는 재료를 담고, 맵기 단계를 선택했다. 여름이는 입맛을 다시면서 벌써부터 흥분해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걸로 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애다. 그건 나도 마친가지지만...
"언제 나오는 거야~~~"
"이런 먹깨비 같으니라고~ 아마 태어날 아기도 너 닮아서 먹깨비가 나올 걸~"
"우리 애기가 듣는다~ 그리고 먹깨비가 어때서~~~건강하기만 하면 돼지~~~"
주문한 마라탕이 나왔고, 맵기 1단계인데도 많이 매워서 습습~하며 둘이서 말도 없이 마라탕을 흡입했다. 여름이에게는 맛있는 걸 먹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나는 그런 여름이의 표정이 너무 좋았다. 숙주가 아삭아삭하고 매우 신선했고, 다른 재료들도 하나하나 다 식감이 살아있어서 입이 즐거웠다. 역시 줄서서 먹는 맛집이라 할 만했다. 매워서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안그래도 나온 배가 더 나와서 부른 배를 두들기는 여름이가 너무 귀여웠다.
"이제 다 먹었나~ 칭구~~~그럼 빙수집 가야지~~~훗~"
"내가 졌다~졌어~아니 마라탕 곱배기를 먹고도 빙수 생각이 나냥?"
"그럼~~~디저트 배는 따로 있거등~~~가자~~할매집~~~"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던 빙수집이 있는데, 어렸을 때 당시 60대 초반이던 빙수집 할머니가 어느새 70세를 훌쩍 넘기셨다. 10년 넘게 찾아가는 단골집이다 보니 마치 친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느낌이다. 빙수집은 북촌거리에서 조금 더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작게 입간판으로 빙수집이라 쓰여있고, 가게 앞에 가면 유리창에 수제 팥이라고 팥 색깔로 대문짝만하게 쓰여있다.
"아이고~~~왔어들~~~그래~~~어서 앉어~~~안그래도 오늘 아침에 팥 삶았는데 때맞춰 잘 왔네~~~"
"할매~ 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할매 품에 안겨서 한참을 할매 얼굴에 얼굴을 부볐다.
"아이고~ 다 큰 가시나들이 얼라같이 뭐하는 기고~ 어서 앉그래이~"
할매는 서둘러 고운 얼음을 만들어서 사발 가득 담고, 위에 팥을 얹어서 연유를 한번 빙 둘러서 내왔다. 할매의 빙수가 특별한 이유는 팥 때문이다. 팥이 너무 달지도 밍밍하지도 않고 국산팥이라서 그런지 너무 고소했다. 그리고 할매는 팥을 너무 뭉개지지 않게 해서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통팥이 씹히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할매~ 손맛은 여전하네요~ 너무 맛있어요~~~"
"그...손자가 인스탄지 뭐시깽인지 올려가~ 요즘 줄서서 먹는다 아이가~~~"
"와~~~우리가 행운아네요~~~후훗"
마라탕에 달달한 빙수까지 먹고 나니 이게 바로 완벽한 휴일이지 싶었다. 빙수를 먹고 나서 밖에 나와 북촌거리를 거닐었다.
"우리 가을이~~~ 언니가 소개팅 시켜줄까? 지금 대기자만도 수두룩 빽빽인데~~~"
"됐거등~~~그런 얘기는 그만하고~~~초음파 사진이나 좀 보여줘봐~~~"
초음파 사진을 봤다. 작고 귀여운 태아가 몸을 웅크리고 손과 다리를 모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신기했다. 경이롭기까지 했다.
"와~~~지난번보다 더 큰 것 같아~~~생명의 신비로구나~~~"
"그러니까 너도 얼른 결혼해서 애기 가져~~~눈에서 꿀 떨어진다~"
"왜 또 얘기가 그리로 새냥~~~난 비혼주의거등~~~난 우리 아빠랑 평생 같이 살거거등~~~"
"야~ 네가 이러니까 아부지가 나한테 전화해서 너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라 그러지~~~제발 정신 좀 차려라~!"
결혼! 결혼! 결혼! 나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옆집 영수 얘기부터 건너집 철수 얘기까지 모든 소재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니 대체 결혼이 뭐길래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잠을 청하려니 잠이 안왔다. 아빠는 식탁에 앉아서 반주를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보니 안주라고는 오이 몇조각뿐이었다.
"아빠~ 내가 안주 좀 잘 챙겨먹으라 그랬잖아~~~"
"이거면 됐지~~~뭐가 더 필요해?"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서 터트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했다. 아빠는 내가 인생 첫 요리로 만든 계란말이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틈만 나면 나한테 계란말이를 해달라고 했다. 딸이 해주는 요리라서 그런지 더 맛있다며 어린아이처럼 조를때도 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계란말이를 가지런히 접시에 담아서 식탁에 올리고 소주잔을 하나 더 꺼냈다.
"아빠~ 나도 한잔 줘~"
"어쩐 일이래~ 아빠 술 친구를 다해주고~ 자 받으~시~오~허허허"
아빠는 술잔 가득 소주를 따르더니 건배를 청했다.
"자아~~~우리 딸 올해 안에 좋은 짝 만나길 축원하며~"
또 그놈의 짝타령이다. 나는 못 들은 척 하고 여름이를 만나서 뭐했는지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았다. 어려서부터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서인지 아빠랑만 있으면 나도모르게 수다스러워진다. 엄마는 내가 어려서부터 없었다. 아빠는 엄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엄마에 대해서 물을 때면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본 적도 없는 엄마가 그리울 때면 울면서 떼를 쓴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엄마를 만나게 해달라고. 아빠는 그럴 때마다 함께 울면서 나를 품에 안았다. 이제는 더이상 나도 지쳐서 엄마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내일 일요일인데 우리 딸~ 아빠랑 같이 광장시장이나 갈텨?"
"좋지~~~그럼 가서 핫도그랑 핫바 사주라~~~"
나는 어려서부터 핫도그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으로 좋아했다. 설탕 듬뿍 발라서 케첩을 듬뿍 뿌려주는 광장시장 아주머니 집 핫도그는 정말 끝내줬다. 그 맛에 반해서 지금도 종종 아빠랑 핫도그 집에 가곤 한다.
"딸~ 일어나~ 밥먹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밥상에는 어김없이 김밥 꼬다리가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아빠는 팔다 남은 김밥 꼬다리를 아침상으로 내놓았다. 그래도 그게 어찌나 맛있는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곤 했다.
"딸~눈 좀 뜨고 먹어~~~"
딸바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눈도 못뜨고 있는 딸을 세상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허긴 일평생 딸만 바라기하며 살아왔는데,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서 광장시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시장은 사람들로 붐볐고, 시장 입구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들을 헤집고, 시장통 안으로 들어서자 먹거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구쪽에 떡가게와 과일 상점들이 있고, 좀 더 들어가자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분식코너에서 사장님들의 분주하고 익숙한 손놀림들이 눈에 띄었다. 아빠와 나는 몸에 밴듯 맨끝에 있는 이모님댁으로 향했다. 어려서부터 가던 단골집이었고, 다른 집들도 가봤지만 그집만한 곳이 없었다.
"이모~ 저 왔어요~"
"아이고~이게 누구야? 우리 가을이 왔어? 어여 앉어~오늘도 그렇게 주면 돼지?"
"네~~~이모가 해주는 핫도그가 너무 그리웠어요~"
"그랴~~~내가 금방 해줄게~~~5분이면 돼~"
이모님은 여전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겨주어서 보는 사람마져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또 손끝은 얼마나 야무진지 주문한 요리들을 금새 뚝딱 차려냈다. 맛은 뭐 말로 설명할 필요없이 너무 맛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골이니 이모님은 내가 갈때면 딸처럼 대해주시고, 핫도그도 항상 두세개씩 더 얹어주곤 했다.
"이모~ 이렇게 많이요?"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았다. 쟁반에 수북히 핫도그가 담겨 있었다.
"우리 가을이가 왔는데, 이모가 당연히 많이 줘야지~가을이가 어려서부터 핫도그라면 사족을 못 썼잖어~"
"아버님도 많이 드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올 때마다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허허허"
역시 이모님의 핫도그는 맛났다. 핫도그 집은 많지만 이모님의 핫도그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설탕이 듬뿍 발라졌고, 케첩도 아낌없이 듬뿍 뿌렸다. 지금은 바빠서 자주 못오지만 학생 때는 틈만 나면 왔었다. 이모님이 보고 싶어서 혹은 핫도그가 생각나서 혹은 엄마 비슷한게 생각나서_이모님이 엄마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모님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남편분과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사별하셨다고 했다. 이모님은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남편분이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라고 이모님은 가끔 내게 말했다. 나도 이모님처럼 누군가를 그렇게 '무진장'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그렇게 온전히 빠져든다는게 겁이 나서 누가 다가와도 밀어내곤 했다.
핫도그를 배불리 먹고 나서 이모님과 포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오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휴일의 시간은 평일과 다르게 2배속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한수완 변호사님을 떠올리면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변호사님 같은 분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느날과 같은 월요일 아침_어쩐지 집안이 평소보다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부스스한 머리칼로 욕실에 가서 씻고 식탁에 와서 앉으니 아빠의 쪽지 편지가 있었다.
"오늘은 아빠 애덜 단체 예약이 있어서 일찍 나가니까 밥 꼭 챙겨먹고 나가. 우리 딸"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계란찜과 김치볶음 그리고 된장찌개를 해놓고 나갔다. 아빠의 계란찜이라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졌다. 역시 아빠의 계란찜은 최고다. 아빠의 계란찜은 푸딩 같다.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밥을 먹고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출근시간이 가까워져서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신호에 걸리지 않으려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오늘도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출근시간 5분 전에 도착했다.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올렸다.
아니 그런데 이게 왠일?
변호사님이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고 있는게 아닌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주말은 잘 보냈어요? 나는 휴일 내내 잠만 잤어요~"
"네~ 저는 핫도그 먹으러 갔다 왔어요..."
"뭐야~ 가을씨는 남자친구 없어요?"
"네...뭐...아직..."
"내가 남말할 때는 아닌데, 일도 좋지만 연애도 해요~ 그러다 나처럼 이렇게 때를 놓치게 돼요~"
"변호사님...그런데...그 때란게 꼭 있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운명의 짝이 나타날 수도 있고..."
"아직도 그런 운명론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최가을 변호사는 정말 순수한 것 같네요~하하"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당장은 누굴 만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난 운명을 믿었다. 지구 반대편이든 어디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서 궤도를 몇바퀴 돌고 돌아서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렸을 적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거기에 나오는 공주님과 왕자님 같은 스토리가 현실이 되기를 꿈꿔왔다. 나의 백마탄 왕자님은 언젠가 나타날지도 몰라. 그런데 아직 끌리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아! 이사람이구나! 하는 사람을 언젠가는 만나기를...그때까지 나는 어떤 감정소비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은 의뢰인의 1심 재판이 있는 날,
변호사님과 준비를 하고 재판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뻔뻔한 작자의 면상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속에선 분노가 끓었지만 침착하게 변론 준비를 마쳤다. 변호사님이 1차 변론을 했고, 내가 덧붙였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에게 폭행을 한 것에 대한 정당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지만 폭행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우리는 수집한 증거를 제시했고, 증인석 심문도 했다. 의뢰인을 폭행하는 모습을 수차례 의뢰인의 여동생이 목격을 했고, 여동생이 증인석에 앉았다.
"증인은 의뢰인과 어떤 관계죠?"
"네...저는 여동생입니다."
"증인은 의뢰인이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맞습니까?"
"네...제가 가게로 언니를 보러 갔을 때 창문 안으로 형부가 언니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모습을 여러번 봤어요...언니는 저항도 못하고, 바닥에 질질 끌려 다녔어요~어떤 날은 손님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언니에게 주먹질을 했어요."
"자_그럼 증거 영상 보여드리겠습니다."
영상 속에서 의뢰인의 모습은 정말 참혹했다. 의뢰인은 영상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1심 재판이 끝났다.
"최가을 변호사~오늘 정말 수고했어요~나는 들렀다 갈 때가 있어서 먼저 사무실로 들어갈래요?"
"네~변호사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저 그럼...먼저 들어갈게요..."
사실 좀 기진맥진해졌다. 몸에 있는 모든 세포들을 다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재판이 끝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졌다. 상대측 변론을 하는 걸로 봐서 다음 재판때 더 꼼꼼하게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하게 앉아있는 꼴을 보려니 당장이라도 가서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법으로 심판을 내려야 한다. 꼭 유죄를 받아내고 말 것이다. 이번 사건은 폭행건과 이혼 심리 둘다 다뤄지고 있다. 의뢰인이 하루 빨리 이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사무실로 들어가서 재판 자료들을 한번 더 검토하고, 잠시 의자에 기대 눈을 붙였다. 그때였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최비서님이었다.
"변호사님~ 제가 카페가면서 변호사님 것도 사왔는데, 드실래요? 여기 컵케이크가 끝내주거든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단게 땡겼는데~후훗~잠깐 들어오실래요?~같이 드세요~안그래도 잠시 쉬려던 참이었어요~"
"네~그럼 저야 너무 좋죠~하하"
최비서님은 일잘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벌써 한수완 변호사님 곁에서 일한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최비서님은 후덕한 외모에서 풍겨지는 여유로움과는 달리 일처리는 너무나도 빠르고 완벽했다. 그래서 변호사님도 최비서님을 많이 아끼고 신뢰했다.
"가을 변호사님~ 힘들죠?"
"아니 뭐..네...오늘은 좀 기진맥진해지네요..."
"그럴거에요~그게 당연해요~특히 이런 사건에는..."
최비서님은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날 봤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어떤 백마디 말보다 그게 더 힘이 되었다. 나는 힘을 내서 마지막 서류를 더 검토하고 회사를 나섰다.
회사 현관 앞, 오늘은 왠지 그냥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모님 댁에라도 갈까...'
회사에서 이모님댁 까지는 대략 30분 거리_서둘러 운전대를 잡고 이모님댁을 향해 나아갔다. 광장시장에 도착하니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다행히 이모님은 이제 막 정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왠일?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한수완 변호사님이 이모님댁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아니...변호사님이 여길 어떻게..."
"우리 가을이가 왠일이야~이렇게 늦게~"
"가을 변호사님이 간다던 핫도그집이 여기였어요?"
변호사님 테이블에는 소주잔이 놓여있었고, 소주병에 담긴 술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뭔가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변호사로서의 촉이랄까. 핫도그 집에서 소주라니_뭔가 사연이 있는게 분명했다. 이모님 낯빛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운도 감지했다.
"아니~ 둘이 아는 사이야? 변호사님은 우리 가게에 종종 들러~ 오늘은 특별히 남은 소주 한병 내줬네~"
나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변호사님~ 저도 한잔만 주십쇼~훗~"
"어~ 가을변호사가 술도 마실 줄 알아요? 하하"
"네~ 뭐~ 제가 못 마시지는...않죠? 하하하"
"그럼 딱 한잔만 줄게요~ 선심썼다~하하하"
월요일 밤인데, 금요일 밤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금요일 오후 회사 로비 1층 카페 안_
사내 복지 차원에서 직원들은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오늘은 한수완 변호사님과 같이 커피를 마시러 내려왔다. 한수완 변호사님은 카푸치노를 주문했고, 난 왠지 카라멜 마키아또에 시럽까지 두번 더 추가해서 마시고 싶어져서 그렇게 주문했다. 달달한 게 당기는 건가.
"오늘 단게 당기나 보네요."
"네~ 오늘 왠지 더 힘을 내야 할 것 같아서요~ 훗~"
"지금도 충분히 힘을 내고 있는데 거기서 더요? 그러다 쓰러집니다. 핫하~"
1심 재판 선고일이어서 변호사님과 법정으로 향했다. 심리 시간이 좀 길어지긴 했지만 1심 재판으로 끝을 맺었고 유죄판결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혼 재판에서도 승소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기징역을 받아내고 싶었지만 법의 심판대로 해야하는게 변호사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많이 느껴졌다.
"승소했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징역 3년형이라는게 스스로는 좀 납득이 안되서요..."
"우리 변호인들은 어쩔 수 없이 법의 정의를 실현해야 하니까요...
나도 가을 변호사님처럼 마음의 갈등을 겪었던 적이 많았어요...신입변호사 때는 특히 더...오늘
거기 같이 갈래요? 아...그런데...잠깐만..."
변호사님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몸이 경직됐다. 변호사님이 내 단화에 풀린 끈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묶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누가 가을변호사를 붙잡나 본데요?"
"그럼 혹시? 하하"
"아유~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같이 저녁 먹을래요? 지난번에 데리고 간다고 했던 순대국밥집 데려 갈게요."
"앗~ 정말요? 안그래도 좀 허기졌는데...오늘은 정말이지 허기지네요~"
순대국밥집은 노포였다. 작은 가게 안에 테이블이 3개 정도 있었고, 할머니가 한분 계셨다.
"어서와~"
변호사님은 늘 앉던 자리라며 가게 안쪽으로 나를 인도했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귀엽고 앙증맞은 양은 주전자에 따뜻한 보리차를 내어 주셨다. 그리고 기본 찬으로 고추와 된장 그리고 겉절이와 깍두기를 내오셨다.
"오늘은 어쩐 일로 색시를 다 데려왔어? 결혼 할 색시여?"
"아이고~ 후배 변호사예요~"
"뭘~ 딱봐도 색시감이구먼~ 총각이 여길 10년 넘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이렇게 예쁜 색시를 데리고 온건 첨이잖여~"
변호사님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좀 머쓱해했다.
"흠 흠...저...가을변호사님~변호사도 밥심인 거 알죠? 왠만하면 아침도 꼭 먹고 나와요~그리고 오늘은 내가 2차까지 쏩니다."
"앗~변호사님~저한테도 다음에 밥 살 기회 꼭 주셔야 됩니다~"
"네~얼마든지요~"
곧 순대국밥이 나왔다. 그런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완 변호사님이 단골이라는 걸 인증할 정도로 정말 순대와 머릿고기가 그릇 밖으로 쌇일 정도로 수북히 담겨 있었다.
"이거 곱배긴데요? 하하"
"이모님이 좀 손이 크세요~하하"
너무 허기가 졌기 때문에 숟가락 가득 국밥을 퍼올렸다. 그러곤 국밥 한술에 겉절이를 얹어서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이모님댁 순대국밥은 겉절이와 순대국밥의 간이 절묘했다. 나는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빠가 어려서부터 간을 슴슴하게 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간이란 건 적당해야 좋다. 음식의 맛을 간이 전부 다 지배해 버리는 게 싫다. 음식 본연의 맛이 느껴지는 요리를 좋아한다. 이 집이 딱 그랬다.
"변호사님~ 여기가 왜 단골집인지 알겠네요~너무 맛있어요~핫하"
"내가 뭐랬어요? 많이 먹어요~난 가을변호사가 이렇게 먹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네~ 그럼 더 분발해야겠는 걸요?~핫하"
식당 밖으로 나와서 변호사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변호사님은 끝내주는 디저트 맛집으로 나를 데려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변호사님~ 정말 말씀 안해주실 거예요?"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하하"
도대체 어떤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30분 넘게 도시의 불빛 속을 통과해 달려간 곳은 달동네 어느 슈퍼 앞이었다. 슈퍼 앞에는 평상이 놓여 있고, 1미터 앞 울타리 너머로 눈부신 야경이 펼쳐졌다. 풍경을 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늘 바쁘게 지나가기만 했는데, 이렇게 평상에 앉아 야경을 본 다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변호사님은 브라보콘 두개를 내밀었다.
"와~이거 제가 엄청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몰랐어요? 내가 가을 변호사한테 더듬이 세우고 있는거?"
기분이 좋은게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야경 때문인지 변호사님 때문인지 헷갈렸다. 밤이 깊어갔다.
토요일 아침_카톡 알림소리에 잠에서 깼다. 워낙 잠귀가 밝아서인지 작은 소리에도 잘 깬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했는지 아직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을 변호사님_오늘 같이 바다 보러 갈래요?)
한수완 변호사님이었다. 바다라_바로 옆에 바다가 있는데도 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내고 욕실로 직행했다.
대문 밖으로 나가니 변호사님은 이미 와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변호사님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머리칼이 바람에 부스스하게 날리고 평소보다 더 곱슬거렸다. 귀여운 푸들이 연상됐고, 180센치가 넘는 큰 키라서 그런지 청바지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물끄러미 변호사님을 보고 또 봤다. 이렇게 자세히 변호사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멋진 분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웠던 내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쿵...쿵.......쿵...........
"가을 변호사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훗~ 내가 오늘따라 더 멋져 보였다던가? 핫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가을 변호사님...저기...트렁크 좀 열어볼래요?"
"네? 네..."
트렁크를 천천히 열어서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보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있었다. 커다란 상자가 꽃밭에 앉아있는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간식 하나하나에 일일이 포스트잇지로 파이팅이란 문구가 붙어있었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가을 변호사님~가을 변호사가 로펌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계속 가을 변호사를 보게 됐어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가을 변호사를 향하고 있었어요. 늘 밝고, 따뜻하고 꾸밈없는 가을 변호사가 나는 너무 좋아요. 내가 가을변호사님 곁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요?"
한수완 변호사님은 그러면서 좀더 가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거의 1cm도 안되는 거리에 변호사님이 있으니 순간 숨이 안쉬어졌다.
"저...그...그게..."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날 제대로 한번 봐줬으면 하는 거예요."
"저...변호사님...저에게는 '엄마'라는 존재가 없어요. 아빠가 딸바보라서 저를 엄청나게 사랑하고 아껴주시지만 저에게는 늘 알게 모르게 결핍이 생겨버렸어요. 이런 제가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뭔가를 확신할 수 없을 때 누군가를 만나도 될지 그게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돼요."
"내가 아는 가을변호사님은 누구보다도 밝고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에요. 어머님이 안 계셔서 가을변호사님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네요. 내가 그 빈마음을 다 채워줄 수는 없지만 한가지 약속할 수는 있어요. 늘 가을변호사님 곁에 있을게요. 외롭지 않게 할게요."
변호사님과 함께 노을지는 바닷가 해변을 손잡고 걸었다. 이렇게 변호사님과 함께 천천히 걷고 싶다.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대로도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