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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픈손가락 Sep 02. 2022

어느 독서광 무지랭이의 글쓰기 예찬

더 늦기 전에 다시 나는 책

책은 정말 내게 고마운 존재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함에 있어 용기가 필요할 땐 지식과 정보를 통해 가능성을 보여 줬고, 아픈 상처를 극복해야 할 땐 팍팍한 삶의 반창고가 돼 줬다. 숱한 실패로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땐 따끔한 회초리가 돼 줬고, 커다란 상실감으로 괴로워 몸부림 칠 땐 조용히 다가와 지친 어깨를 토닥여 줬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내가 너를 믿는다고.


‘글쓰기’와 나는 그런 와중에 만났다. 용기가 바닥을 치고, 매일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벅차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던 중이었다. 슬픈 영화를 보면 아이처럼 눈물이 났고,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엔 마음의 진기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허전했다. 비참하게도 사는 게 고역이란 말을 나는 이해했다. 물론 이전에도 글은 썼다. 그런데 그땐 느낌이 달랐다. 평소 이성에 관심 없던 사람이 유일무이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을 때 “난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구나.” 느껴지는 상사(相思)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 글쓰기가 제 본연의 모습으로 반갑게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란 책을 만난 것도 그때다. 아팠던 상처가 다 아물기 전이었다. 그깟 조금 쓰라리고 불편한 것쯤 이젠 견딜 수 있다고 자신했을 때였다. 여느 날처럼 서점 진열대를 둘러 보다 꽂힌 책 제목을 보고, 난 그동안 참았던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아픔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자리를 옮겨 뼛속에 들어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제목에서 깨닫고, 생각을 비로소 뼛속으로 옮기고 나서야 지난 아픔이 거기 숨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당신이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우린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글쓰기 사전 작업이나 구성의 기술보다 쓰고 싶다는 열망이 중요한 것이라고. 단순한 기술이 아니며, 일종의 명상으로 자기 수련의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을 때는 그 글이 객관적인 사실을 높은 정확도로 기술했을 때가 아니라 글을 쓴 사람과 글 소재 관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주거나 신선한 깨우침을 줄 때라는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그동안 글쓰기를 포장해 보여주기 식으로 해왔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꾸짖는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뭔지, 자신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제목처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봐야 한다. 내 맘에 무엇이 담겼는지를 담담하게 글로 써내는 수련이 됐을 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글이 된다. 늘 꿈꿔 왔던 것처럼.


■ 무엇을 위해 쓰는가


글을 쓰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현실적인 목적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꿈꿔 온 이상적인 목적일 수도 있다. 글을 쓸 수 있다면 그 목적이 뭐가 대수랴 상관없다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난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이상적인 목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


어느 이름 모를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진정한 위기의 순간에 진짜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다." 한동안 이명처럼 귓가에 맴도는 이 말을 화두로 붙잡고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세상 내게 닥친 모든 위기의 해법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그 어디에도 아닌 내 안에 말이다. 어차피 세상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나를 중심으로 돌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를 잃어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다.


세상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바삐 돌아간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린 쉼 없이 최선을 다해 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행여 자신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우리를 만난다. 문제는 건재한 자신을 잃었다고 착각했을 때 발생한다. 쉼 없이 잃어버린 나 찾기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을 올인하고, 정작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아닌 삶이란 아까운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계속 진행’이 아니라‘일시정지 잠시 멈춤’이란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걷고 뜀이 아닌 ‘일시 멈춤.’ 알고 보니 속세에 찌든 허울 좋은 말장난과 글 재주를 가졌던 혜민 스님의 대표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진작에 간파해 베스트 셀러가 됐다. 그런데 정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긴 있었다.


서두가 중언부언 길었던 것은 ‘무엇을 위해 나는 글을 쓰는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멈추려고 글을 쓴다. 평소 우린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뛴다. 그럼 숨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확 올라 땀샘까지 열리면서 뭔가 이뤄내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론 뭘 흘리고, 뭘 잃는지도 모른 채,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바쁜 나날만이 계속된다. 여기에 가속도까지 더해지면 꼭 사고가 터진다. 그래서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말이 그냥 열심히 하란 거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일단 멈춰서 해야 한다. 필사를 하든, 컴퓨터 타이핑을 하든 일단 멈출 필요가 있다. 여기서 ‘멈춤’이란 목적으로 하는 주된 ‘생각’ 외 다른 ‘잡 생각’을 멈춘다는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잡 생각을 멈추고, 주된 생각으로 하는 몰입”이라고 표현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앞에 앉아 16초 마다 자꾸 떠오르는 하루 5만 가지의 상념을 차단하고,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영현 작가의 "내 인생의 호오포노포노" 61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좋은 것을 좋게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가장 못난 것, 때 묻고 아픈 것,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을 안고 볼 수 있는 것이 용기입니다.” 맞는 말이다. 지금 내게 좋은 건 굳이 애써 시간을 내 글로 옮기는 용기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가장 못난 것, 때 묻고 아픈 것,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을 골라 글로 옮기려 했을 땐 가상한 용기가 필요해진다. 그러니까 글은 내 가장 부끄러운 치부를 그대로 마주할 수 있을 때, 그런 나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말리는 ‘잡생각’을 멈출 수 있을 때 비로소 써진다.


글쓰기는 또 당면한 문제를 객관화해 보는데 아주 좋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에 대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답이다. ‘생각’이란 아무리 잘한다고 해봐야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이고, 현실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볼 순 없다. 결국 내가 내 생각을 보려면 우린 ‘상상’이란 힘을 빌려와야 한다.


경험에 의하면, 그 ‘생각’이란 걸 글로 쓰면 참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상상’으로만 더듬던 내 안의 ‘생각’을 진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번민, 우울증, 중독 같은 마음의 병들은 의외로 문제를 객관화해 볼 때 극복하기가 쉽다. 숲에 갇혀 본 경험이 있는가. 숲 안에 갇혀 있으면 내가 갇힌 숲의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다. 요즘엔 해결책으로 실종자 수색에 ‘드론’을 쓴 단다. 숲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이로 ‘드론’을 띄워 숲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지 보며 실종 경로를 추적한다.


‘객관화’의 개념은 마치 이 ‘드론‘의 존재와 같다. 그러니까 객관화란 우리가 가진 상처나 문제를 전체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상처나 문제 안에 매몰되어 제한적인 시야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체보기(객관화)는 아주 적절한 대안이 된다. ‘객관화’를 다루는 일이 처음부터 쉽진 않을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드론‘ 띄우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문제의 객관화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상상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여기서 ‘드론 조종기‘에 비유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생각을 객관화 해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글쓰기다. 사람들은 글쓰기가 책읽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하긴 책읽기는 책을 읽고 ‘생각’을 만드는 1단계 과정만으로 충분하지만 글쓰기는 듣거나 경험한 것으로 ‘생각‘을 만든 뒤 정제 농축된 ‘생각’을 다시 밖으로 토해내는 2단계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너무 늦게 깨닫지 않았나 싶을 땐 후회도 많이 된다. 하지만 이제 내가 죽을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할 일이고, 남은 삶의 사명 같은 것이기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이끌리는 삶이 아닌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삶을 꿈 꿀수 있게 해주고, 하루를 가득 채운 포만감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해주는 글쓰기, 더 늦기 전에 나는 당신도 꼭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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