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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미 Jul 07. 2021

찬란했던 소개팅 연대기

웃기고 진지한 자존갑입니다만 中


서른이 되던 해, 갑자기 주변인들이 분주해지며 소개팅인지 선인지를 시켜대더군요.     


서른 이후 첫 소개팅은 보건소에서 일하는 고모가 주선자였습니다. 새로 들어온 싱싱한 공중보건의이자 한의사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만나라 했습니다. 제가 또 자존감 킹이라 뭔가 반감이 생기더라고요. 전문직이니, 콧구멍이 세 개라도 네가 감히 거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뭐 이렇게 들렸거든요. 싫다고 버티자, 엄마가 아쉬워 난리 치셔서 못 이기는 척 진맥 짚으러 갔습니다.


쫙 빼입고요!


오손도손 손목 좀 잡히고 싶은데 눈치 없는 엄마와 더 눈치 없는 고모가 방청객이 되어 뒤에 서 있는 이 분위기 무엇? 그 와중에 맥은 안 짚고 뭔 기다란 설문지 같은 거로 질문을 해대는 한의사. 땀은 주로 어디서 나시나요? 겨드랑이에서 샘솟는다 할 수 없으니, 사타구니에 땀 찬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으니, 이마에 극소량 이슬이 맺힌다 했죠. 좋아하는 음식에 체크를 하래서, 토마토, 양배추, 파프리카 및 각종 과일에 체크를 하고 있었더니 뒤에서 훔쳐보던 엄마가 답답함을 못 이기고 너 고기 좋아하잖아~라고 외치더군요. 세상에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건 많아요. 오라는 연락은 안 오고 태음인에 좋다는 보약만 오더군요. (참고로 전 소음인)   

  

넥스트. 친구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한때 친했던 동생이 갑자기 소개팅을 해주겠답니다. 보통 이런 느닷없는 소개팅이 성공률이 높다죠. 연락처 주고받고 10분 지나자 문자가 와요. “누구 씨~ 저는 소개팅남 누구인데…”로 시작하는 행운의 편지같은 MMS 문자. 불길했죠. 답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벨이 울려요. 부담스럽지만 전화를 받았더니 한다는 말이 “상당히 미인이시라면서요~”였습니다. Game Over! 이 질문엔 뭔 대답을 해도 미인이어야만 해요. “맞아요. 상당하죠.” or “어머~ 아니에요. 아니에요….” 거봐요, 그래서 Game Over! 아직도 전 그 동생이 저의 빅 팬이었는지 혹은 빅 엿을 먹인 건지 궁금해요.     


그다음. 오빠 친구의 회사 동료, 공사에 다닌대요. 만났더니 공사장에 다니는가 싶었지만 뭐 점점 소개팅이 안 풀리니 위축도 되고 애프터 신청도 서른 넘어서는 처음 받아보는 거라 일단 몇 번 더 만나기로. 세 번 만나더니 그날 밤 전화로 다음 주 주말에 우리 부모님 여행 가셔서 집이 비는데 놀러 올래? 라고 묻더군요. 이 나쁜 쉐리, 사람 띄엄띄엄 보네요. 단칼에 거절했더니만 방귀 뀐 놈이 성질을 내면서 사람 이상하게 몰아간다고 분위기 싸하게 만들더군요. 흥하게는 못해도 망하게는 할 수 있습니다만.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밤, 연못을 지나는데 하얀 구렁이가 갑자기 튀어나와 제 다리를 물고 안 놓아주는 길몽을 꿨습니다. 다음 날 소개팅이 들어왔는데 상대는 이비인후과 레지던트였어요. 흰 구렁이=흰 가운 딱딱 맞아떨어지고 얼마나 좋아요. 한껏 기대에 부풀어 나갔는데 인물도 나쁘지 않아요. 근데, 이놈아가 의사란 기대치를 갖는 게 싫었는지 굳이 자기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며, 돈이 없다는 걸 매우 강조했습니다. 상관없었어요. 내 코가 뻥 뚫리기만 한다면…. 근데 이눔아가 뭐만 하면 자꾸 자기가 노동자의 아들이라… 스파게티 좀 먹으려면 자기는 블루칼라의 아들이라… 콘서트 보러 가자더니, 노동자의 아들이라… 이러면서 질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넘의 블루칼라~ 블루칼라~ 아버지가 스머프시니? 그렇게 또 소개팅이 망했어요.     


이쯤 되니 집에선 네가 문제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다음 소개팅은 엄마랑 같이 나가자며 진심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무려 7년간 거절해오던 친척 아저씨 주선의 소개팅을 당장 나가래요.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보다 6살 연상이라 했으나 실물 영접 순간, 60대로 보이는 파격적인 노화를 겪으신 데다, 진짜 이런 말 할 처지도, 해서도 안 되는 거 알지만 한 번만 해볼게요. 정말 더럽게 못생겼습니다. 외모가 다가 아니라더니 성격은 더해요. 허풍과 허세가 말도 못 해요. 밥 먹고 도망치려 했는데 커피도 마시자 해서 근처 스타벅스에 갔죠. 유독 매장이 작아서 이 층에 올라가니 가족 같은 분위기. 태어나서 그렇게 주목받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아저씨와 마주앉아 있을 뿐인데 주변 테이블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개아련하게 저를 쳐다봐요. 그 순간 제가 일어나 테이블 돌았으면 최소 50만 원은 모금했을 거예요.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져 진심 집에 와서 울었답니다.      


그 참극이 일어난 얼마 뒤, 친구의 어머니가 저를 참 예뻐해주셨는데, 지인의 아들과 만나보지 않겠냐 물으시더라고요. 솔직히 상처받기 싫은 마음이 컸었는데, 그 지인이 청담동에 사는 수백억 자산가래요. 심지어 아들은 저보다 두 살 연하래요. It's time to sell 영혼! 생각해보니 내가 청담동하고 딱 떨어지는 각진 외모지 싶고, 샤넬보다 일수 가방 더 선호한다며 희망 회로가 풀가동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동안이 아닌 관계로 연하남이 좀 늙수그레한 남자였으면 했어요. 그가 나에게 “누난 내 여자니까~”라고 하면 당장 너라고 부르렴 하며 다음 주에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제 물러설 곳은 없다 싶으니 그리 쉽게 속물이 되더군요. 소개팅 당일, 분명 두 살 연하라 했는데 스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나와 있는 거예요. 보자마자 자아 성찰을 하게 되면서, ‘누나가… 아니 아니, 이모가 몹쓸 생각 해서 미안해….’ 그래도 2억 넘는 차, 조카 덕에 처음 타봐서 이모는 행복했단다. 굿바이~     


그 찬란했던 소개팅들을 겪고 다시는 소개팅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그다음 아무 기대치 없이 나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 되었답니다.


#웃기고진지한자존갑입니다만 #박윤미작가 #인스타그램jazoneg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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