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출간본] 웃기고 진지한 자존갑입니다만
이솝이 고대 그리스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현재까지 통하는 우화를 만든 것도 대단하지만 당대에 왕의 총애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더 굉장한 일로 느껴지지요. 동화 작가가 꿈인 저에게 이솝 우화는 짧고 재밌고 명쾌하기까지 한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롤모델 같은 작품이죠. 동화가 긴 건 딱 질색이거든요. 밤마다 애들한테 읽어줄 때 목도 많이 아프고.
얄밉도록 의도가 맞아떨어지는 캐릭터 중에 유일하게 거슬리는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명대사 “저 포도는 실 거야”를 남긴 여우입니다. 말속에서 인간 내면이 적나라하게 읽혀 저 혼자 삐진 것이기는 해요. 사람은 때로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체념은 인간에게 단적으로는 위로를, 확장적으론 더 큰 기회로의 발판을 만들어주기도 하지요. 체념하는 자세도 일종의 지혜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화난 포인트는 여우가 확인할 길 없는 포도를 자기 마음 편하자고 시다고 말한 점인데, 전생에 포도였는가 갑자기 포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서입니다.
남의 성공에 초를 치고 빛나는 순간에 불행을 점치며 부정함으로써 본인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부류는 누군가 눈물겨운 노력으로 성공을 거두면 축하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죠. 부자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불행을 논하기도 해요. 이제 좀 잘 풀리려는 사람들은 안간힘을 써서 끌어내려 자기애적 직성을 풀기도 하는데 평범한 사악함이라 지나쳐버리기가 쉽죠. 인간 대 인간의 존엄은 없고, 우직하게 자신의 옹졸함을 모른 척하며 애꿎은 돈을 욕하고, 질투에 얼룩져 잘 나가는 누구라도 짓밟고 보는 잔인함에는 행복이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질투가 인간의 본능이라면 훈련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우였다면 오기를 냈을 겁니다. 몇 번은 더 따 먹으려 시도했을 것이고,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궁리로 바꿨을 거예요. 탱글하게 잘 매달려 있는 포도에 대한 예의로 시어 보였더라도 침묵하는 아비투스가 있었을 겁니다.
결단코 안 되는 일이라면 고요한 체념으로 다른 포도를 찾아 나서며 아쉬움을 그리움으로 남겼을 거예요. 애타게 그리워해 본 자만이 설탕보다 달다는 샤인머스캣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니까.
그 포도는 분명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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