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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미 Jul 14. 2021

재난 영화 후기

[미출간본] 웃기고 진지한 자존갑입니다만

좋아하는 장르가 아님에도 늘 중박 이상의 재미를 보장한다는 이유로 빼먹지 않고 챙겨 보는 영화가 재난 영화예요. 쫄깃거리는 오장육부로 스릴을 타 넘으면서도 초반부터 쟤랑 쟤는 끝까지 살아남겠구나 예측은 쉽거든요. 그 만만함이 좋아요.     


여기엔 몇 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 아니라 인류 종말이 왔대도 아빠들은 일부러 저러나 싶게 무너지는 길만 골라서 운전하는데 늘 30cm 남겨두고 탈출에 성공하죠. 엄마들을 줄리어드 음대를 나왔는지 자식을 안은 구부정한 자세에서도 절대음감으로 노래를 불러요. 할아버지들은 보통 저항 없이 죽음 앞에 당황하지 않으시며, 반려견들은 의외로 끝까지 살아남지요. 꽁냥꽁냥 헐벗고 연애질을 한다거나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미혼들은 대개 첫 타자로 희생되고, 그 지옥 속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으면 키스신을 확보할 수 있죠. 깔짝깔짝 눈동자 각도부터 글러 먹은 중년 남성은 막판까지 우기기 시전으로 관객 속을 뒤집다 가장 통쾌한 최후를 맞이해요.

    

깡그리 초토화시키다가도 늘 희망의 땅 몇 평 정도는 남겨 놓는 법이라 초반에 예상했던 쟤랑 쟤가 어깨를 감싸고 일출을 보며 영화는 끝이 나니까 고무줄 바지 입고 방구석에서 편하게 시청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     


유일한 안타까움은 주인공 절친으로 나오는 반듯하게 잘 커준 인물들인데 환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여럿을 구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이제 좀 살 만해지니까 인류를 대표해서 버튼 하나 누르러 홀로 죽으러 간다거나, 나쁜 아저씨 수작에 탈출 직전 문이 닫히거나 줄에 다리가 걸려 살아남지 못한다거나, 남들보다 세 배는 느린 속도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도 지 코가 석자인 줄 모르고 남은 자들을 위로하며 죽기 직전까지 대사량 많은 캐릭터들이요.      


보아하니 살 사람은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 일 터지면 살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지 않나 싶어요. 얼어 죽으나 뒤집히는 차에 깔려 죽으나 건물 잔해에 파묻혀 죽으나 매한가지로 죽을 팔자면 땀 뺄 것 없이 집구석에서 쉬는 걸로. 천지 사방 좀비들이 요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면 도망치고 숨 참고 그러지 말고, 눈 한 번 질끈 감고 초반에 물리는 게 고효율 아닐까 생각해요.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재난이 내 집을 비껴갈 경우의 수도 있겠고, 백신이나 해독제가 개발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살아남아봐야 트라우마 생겨서 정신도 온전치 못할 것 같은데, 폐허가 된 땅을 재건까지 하려면 체력도 미달이고, 게다가 같이 살아남은 남자 사람과 무조건 대를 이어야할 인류애적  의무감을 생각해보니 아찔하네요. 어쩌죠? 휴머니즘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는데 후기를 이렇게밖에 못 써서... 전 세계 많은 영화 감독님들께 심심한 죄송을 전하며 후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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