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을 두드리고 나면 어디서나 독자가 생겨났는데 그러니 글이 멈춰지지가 않는 것이다. 20대의 글은 도피처로 스스로를 위로했고, 안정감이 생긴 30대의 글은 나 같은 누군가를 위로했었다. 결혼으로 한동안 절필의 세상에서 이유식 만드느라 정신 놓고 살았지만 바이러스가 침공한 지루한 삶 덕에 다시 내 손과 머리는 바삐 움직였다. 도대체 사람들 웃기는 게 왜 이렇게 신날까? 전생에 광대였나?
오랜 시간 에세이 출간에 일말에 욕구가 없었던 건 정적인 수필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고 동적인 수필은 출판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생각이 먼저였는지 행동이 먼저였는지 모를 정도로 문득 도전! 을 외치며 수필을 내기 위해 삶을 회고했는데 많은 날 눈물이 쏟아졌다. 슬프고 억울한 삶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생각해 보니 그토록 사랑과 인정을 받았던 거구나, 고마운 부분이 넘치는구나,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남았구나 생각이 들어서.
마지막으로 퇴고를 위해 가까운 인쇄소에서 책 크기 A5로 한 권의 초고를 만들어 왔을 땐 이미 부대끼던 응어리가 죄다 사라져 최고 권위의 인간미까지 갖춘 정신과 의사와 10회 차 상담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출간이고 뭐고 필요 없다 생각이 들어 한동안 침대에 온전히 누워있었다. 다시 집중해 출판사에 보낼 출간 기획서를 작성할 땐 반전마저 찾아왔는데 증오에 가깝던 20대의 꼬였던 이력이 나를 더없이 특별한 사람으로 둔갑시켜준 것이다.
환경학을 전공한 영어 선생님!예이~~!
계약 대충 해서 판권이 마구 넘어가 EBS에도 출연한 선생님! 와아우~!
미국, 캐나다, 강남에서 남녀노소 살아 계신 사람 다 가르쳐본 선생님!시상에~!
견딘 보람이 몰려왔다. 참길 잘했다. 희망을 버리지 않길 참 잘했다.
❖ 겨울왕국
잘한 건 잘한 거고 준비가 미흡한 줄도 모르고 성급히 투고하다 실수를 범한 건 손에 꼽는 못한 일이다. 개성 넘치게 목차를 만든다며 삶과 죽음 사이에 사랑, 유년 시절, 성년 시절, 여행, 일 등의 소분류 제목을 영어로 썼는데 career를 또박또박 carrier라고 적어 보낸 것이다. 언어 유희라며 단어를 가지고 장난치던 습관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어쩐지 손가락 끝이 쎄하다 싶더니만 메일이고 기획안이고 심지어 원고에까지 홀린 사람처럼 캐리어 에어컨을 향한 애정을 담아 보낸 것이다. (망할 놈의 손가락~) 한참 뒤에야 우연히 확인하다 거슬리는 구역이 있어 들여다보니 누구야? 이렇게 추운 날 계속 에어컨 틀어놓은 인간 누구야? (얼어 죽을~)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쓰지나 말 것을, 영어 가르쳤다고 말이나 말 것을, 수습 안 되는 부끄러움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 뻔하지 남편~!
"여보 나 career를 다 carrier라고 썼어. 미쳤나 봐. 와~ 내가 영어 선생님만 아니었어도 수습이 되겠는데 이건 뭐 세상 무식해 보이는 거잖아. 으아~ 창피해서 죽을 거 같아." 나의 사랑스러운 남편은 "어쩐지, 자기가 메일 보낼 때 보고 이상하다 했다. 난 또 자기가 일부러 그렇게 쓴 건가 했지. 이건 좀 타격이 큰데? 어쩌냐…" 혹시 모르는 것 같아서 자기를 아끼는 마음에 한 가지 알려주는데 이럴 땐 끄덕끄덕하면 안 되고 괜찮다고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거야. 이 똥%*멍&#%충&아~
아아~ 죽일 놈의 사랑한 죄~!!
그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간절히 그려본 미래가 하나 있다. 제발 내가 이 실수담을 웃으며 말할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하고 말이다.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찾아온 걸 보니 인생 꼬여봐야 퍽 별일 아니란 생각이 퍼뜩 든다. 될 일은 된다! 안 될 일은 안 된다! 너무 애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