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병을 달고 2개월, 일병 2호봉 때의 일이다. 밑에 후임도 들어왔겠다, 슬슬 부대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선임들과 농담도 주고받는 때도 많았다. 재밌는 것은 한창 재미있게 웃고 떠들다가도, 진지해지면서 조언이나 쓴소리, 잔소리, 일침들을 하는 선임들의 모습들인데, 때로는 공감되는 이야기도 있어 오랜 기간 기억되는 것들도 있다. 그중 왜 군대에서 일병은 체육복의 단추를 채워야 하는지, 상병은 단추를 풀 수 있고, 병장은 깃도 세울 수 있는지 아주 신박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이야기를 해본다.
당시 중대 최선임으로 군림하고 있던 박 병장과 TV를 보던 중, 그런 이야기를 했다.
"박 병장님, 근데 왜 군대는 꼴랑 체육복 하나 입을 때도 단추를 턱 밑까지 채워야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일병이라 그래. 병장 달면, 단추도 풀고, 깃도 세울 수 있어 임마"
"아니, 그니까 그런 걸로 왜 갑질 하냐 이겁니다. 그런 거 아니고도 병장이면 일을 잘한다거나, 부대 내 히스토리를 알고 있어서 후임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아우라를 만들어내거나 할 수 있는 방법도 많은데, 애들을 꼭 찐따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레벨업"
레벨업이 뭔지 알려줄게
항상, 뜬소리를 하는 박 병장이었지만, 이건 좀 신박하다 싶어 진지하게 물었다.
"레벨업? 진급입니까?"
"아니, 게임처럼 레벨 업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늘어나게 만들어주는 거야"
"아 굳이 그런 병정 놀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잘 들어봐..."
이후로 들려준 이야기를 풀어보자.
군대는 레벨업이다.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이 될 때 한 번씩 크게 레벨업을 한다. 그런데 월급이 6만 원, 7만 원, 8만 원, 9만 원 진급할 때는 만원씩 밖에 안 오른다. 사회에서 최저시급이 5천 원인데, 2시간만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을 진급해야만 한다고 번다고 하면 누가 진급했을 때 그리 좋겠는가. 누가 그리 진급을 목매고 기다리겠는가. 긍정적인 동기부여가 안된다.
그러나 부정적 동기부여는 강하다. 훈련병의 고단한 생활을 마치고 들어와서는 온갖 허드렛일과 악폐습이 이등병에게 집중된다, 그리고 하나 둘 차츰 그 허드렛일에서 풀려나고, 악폐습에 시달리던 이들이 악폐습을 물려주는 과정이 반복된다. 내가 부대에서 경험했던 기상 루틴으로 확인해보자
1. 이등병 / 막내
- 아침 6시 기상하면, 기상음악을 듣자마자 방 끝으로 달려가 조명스위치를 켜고 생활관의 TV를 켠다. 엠넷을 틀고 음악소리를 높인다. 선임들이 기분 좋게 대중가요를 들으며 기상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침대를 정리한다. 재빠르게 군복으로 갈아입고 군화를 신는다. 이때 디테일은 양말을 신을 때 침대에 앉거나 벽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옷을 갈아입고는 빠르게 다른 생활관의 막내들과 모여서 각 생활관의 기상 인원을 종합한다. 누가 근무를 하고 있는지, 누가 아파서 쉬어야 하는지 기상 점호 인원을 보고한다.
이게 기상후 15분 내에 모두 이뤄져야 하며 15분에도 기상하지 않은 선임들이 있다면 그들의 침대로 가 귓가에 "00병장님, 6시 15분입니다."라고 깨워줘야 한다. 이것은 20분, 25분까지 반복하고 무조건 선임을 깨워 점호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2. 일병 / 막내 탈출
- 6시에 곧바로 기상하지 않아도 된다. 기상 음악을 듣고도 밍기적거리며 일어날 수 있고, 그사이 막내가 틀어놓은 음악소리를 들으며 침대를 정리한다. 이제 드디어 옷을 갈아입을 때 앉아서 양말을 신을 수 있다. 아직 벽에 기대어 양말을 신어선 안된다. 그리고, 군복을 갈아입고는 막내들이 취합해온 기상 인원 보고판을 점검한다. 막내들이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을 필터링하는 것이다. 그리고 25분에 막내들과 같이 내려가 점호 장소에서 대기한다.
3. 상병 / 분대장급
- 6시에 기상음악을 들었지만, 5분이 지나도 이불을 덮고 밍기적거리며 누워있는다. 이제 슬슬 옷을 갈아입었으나, 군화를 대충 신고 질질 끌고 다닐 수 있다. 막내, 일병들이 분주히 돌아다닐 때, 엠넷을 보며 아침 시간 잠깐을 즐긴다. 그리고 25분에 일어난 최선임과 함께 밍기적거리며 내려간다. 혹여라도 점호 인원이 틀렸다면 점호가 끝난 후 일병을 갈궈 이등병들이 긴장할 수 있게끔 만든다.
4. 병장/ 말년
- 기상음악이 안 들린다. 누군가 와서 자꾸 귓가에 속삭이는데 그것도 간지럽고 귀찮아 짜증을 낸다. 그리고 25분이 되어서야 친한 상병, 분대장들이 와서 짜증 내듯 깨우면 이불을 구석에 던져놓고 군복만 갈아입고, 군화는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내려간다. 이미 점호가 시작되어있기도 하다.
하루 중 30분이 안 되는 루틴에서 이등병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정도다. 6시에 바로 눈을 떠야 하고, 재빠르게 방의 조명을 켜고, TV를 켜는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지만, 앉거나 벽에 기대어 양말을 신어서도 안되고, 곧바로 선임을 깨워서도 안된다.
위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이런 루틴은 한 달마다 하나씩 해제가 된다. 이등병 후임만 들어와도 조명을 켜거나 TV를 켜는 것을 안 할 수 있고, 이등병 4개월 차만 되어도 양말을 앉아서 신는 것도 눈치를 보면서 가능한 일이 된다.
돌아와서, 레벨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이다. 내가 다음 달이 되면 무엇이 될 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현재를 살 수 있다. 지금은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박 병장이 들려준 레벨업은 여기까지다. 왜 체육복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야 하는지, 나는 왜 모자를 비스듬히 쓰면 안 되는지, 왜 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안 되는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납득했다. 언어폭력이나 괴롭히는 악폐습은 문제였고, 점차 사라져 갔지만, 기상 루틴이나 체육복 단추 등 일상의 루틴에서 작은 장치들이 22개월의 군생활에서 작은 희망들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다.
그리고, 모든 제한 장치가 다 해제된 말년 병장이 되고 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한 달을 보냈다. 더 이상 부대에서 오를 수 있는 위치도 없고, 해선 안 되는 것도 없었다. 그 힘들다는 야간근무에서도 모두 열외 되고, 아침 점호에도 아프다고 안 나가고, 모든 청소에서 열외 되어 남들 청소할 때도 사이버 지식정보방에서 컴퓨터만 했지만 조금도 희망이 없었다. 말년 휴가를 나가기 전까지 두 달이 남은 상황에서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이 가장 고통스러운 이유는 단기적 성과, 성취, 희망이 사라지고 장기적인 성과, 성취, 희망을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달의 월급은 이번 달과 같을 것이며, 오늘의 노력은 연말의 성과급까지 6개월이 넘게 남았기에 결코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고 지루할 수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말하는 '군대 있었을 때에 대한 미화'는 보통 이런 일상의 루틴 하나하나에서 제한이 해제되고, 희망을 가졌던 끊임없이 성장과 성취만 있었던 시절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