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워커비 Jan 28. 2021

골목길이 사라졌다

더이상 섞일 수 없는 세상

 1989년에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부모님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하셨다.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송파였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나 역시 송파동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처음 시작은 이발소의 셋방에서, 그 다음은 2층주택의 반지하에서, 그다음은 단독주택의 2층에서 세입자로 살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파트 분양을 받게 되어 나는 9살에 가락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오늘 할 얘기는 골목길에 관한 것이다. 나의 아동기는 골목길에서 보냈다. 90년대 초중반의 주택가는 지금 빌라촌이 들어선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좌측에 보이는 것과 같이 자동차 한대 지나가기도 아슬아슬할만큼 도로가 좁아 차가 쉽게 드나들지 못했고, 그만큼 골목길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쉼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골목길을 어느정도로 친숙하게 느꼈는지 에어컨이 보급되기 전 열대야로 잠을 자기 힘든 날에는 집앞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이불을 들고가서 골목길에서 자곤 했다.


 그러나 자동차가 점차 늘어났고 1가구 1차량 이상이 필요해지기 시작하자 점차 주택가에는 주차장을 갖춘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파트까지 올릴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면 빌라를 지어 수익성을 높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차가 많아지고 주택가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차들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은 좀처럼 골목길을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1기 신도시 공급과 더불어 대한민국 전역에서 아파트 공급 붐이 일어났다. 공동주택으로 가면서 나의 골목길은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을 잃었을까?


 위의 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파트가 집중공급되던 시기 이전까지는 현저하게 부족한 주택들로 인해 자가비율이 높지 않았고, 서울로 상경한 다양한 노동자들이 뒤섞여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90년대 드라마를 보더라도 셋방에 얹혀사는 공동주거 형태가 많이 발견되는데 바로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골목길의 모습이었다. 


 하나의 골목길을 두고 삶을 공유하는 가구들의 특징이 워낙 다양했다. 아파트라는 것이 더욱 귀한 시대였으니 전문직이고, 자영업자고, 월급쟁이고, 사업가고 모두 한동네 모여사는게 익숙한 그림이었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어려운사람들도 같은 지역을 공유하고 살았다. 


 이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사이에서 더 쉽고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부모의 재력이 어떻든간에 동네 주민이면 서로 어울리고 살았다. 당시에는 3대가 같이 사는 경우도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 동네 친구기도 하고 우리 할머니 친구의 손주기도 한 녀석들과 뒤엉켜자랐다. 



 아버지가 해외파견근무를 가서 할머니, 어머니와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요구르트를 얻어먹고 하루종일 거실에 누워 놀기도 했고, 아래 주인집 누나와 튜브 풀장을 만들어 수영을 하고 놀기도 했다. 새로 이사 온 녀석을 경계하다가도 하루종일 골목길에 서있으면 자연스럽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등을 하면서 하루만에 친해지곤 했다. 


 동네 친구들의 풍경은 모두 달랐다. 누구는 엄청 큰집에 살았고, 누구는 주인집이라고 불렸고, 누구는 지하방에살았다. 그런데도 저녁 쾌걸조로하는 시간에는 지하방에 모여서 다같이 TV를 보고, 와리가리하다가 배고프면 큰 주인집에 사는 친구네에 가면 주인집 할머니가 짜파게티를 끓여주셨다.


 그리고 이사간 아파트의 풍경은 또 달랐다. 친구 아버지 대부분이 성공한 자영업자, 대기업 회사원, 은행원, 해외파견근무자등 흔히 요즘말로 중산층이었다. 부자는 아니어도 가난한 친구들이 없었다. 신축아파트에 입주하여 전학들어온 전학동기들의 학업성취도는 높았고, 곧잘 반장을 하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어느 집을 가도 다들 똑같은 아파트 구조를 갖고 있었고, 놀이터에 나와서 다들 글러브 하나씩을 챙기고 야구를 했다. 다 비슷했다. 아파트 단지가 크다 보니 멀리 놀러나갈 생각을 안했고 단지 내 놀이터에서 같은 단지 친구들과 놀아도 충분히 재밌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신축아파트와 함께 높은 담장과 자동차 차단기 등 외부와의 단절을 만드는 장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 생활반경안에서의 교류는 공고해지고 빌라촌에 사는 친구가 아파트로 와서 어울리고 노는것이 쉽지 않아졌다.


 같은 동네에서만 발생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강남서초잠실등만 아니라면 그래도 큰평수는 비싸고, 작은 평수는 조금 싼 별차이 없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20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아파트는 크게 폭등했고, 1억대 아파트가 6억대 되는것도 한순간이었다. 


 이후 10여년간의 장기 침체기를 거친후 2010년대 중반부터 근 5년간 거침없이 상승해온 아파트가격은 더 큰 장벽을 만들어 냈다. 같은 동네에서 빌라촌 아이들이 아파트로 넘어갈 수 없어졌던것이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풍경이라면, 이제는 그 단위가 5억, 10억 단위로 더 커져서 지역간 쉽게 교류되기 어려운 장벽이 세워졌다.


 문득 어딘가 커뮤니티에서 '이제는 더이상 의사 자녀와 동네 구멍가게 자녀가 어울리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 90년대 골목길 문화가 대변했던 뒤섞인 교류의 문화는 저마다 각자의 장벽을 세워가면서 상류층은 상류층끼리, 중산층은 중산층끼리, 서민안에서도 서로 급간을 나누며 자녀들을 섞이지 않게 신경써 키우고 있다. 



 섞여지낸다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좋은 것인지 사실 가치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모마음으로는 섞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주택공급되는 지역들에 소셜믹스가 얼마나 강하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원주민들, 입주자들의 반대 기류가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반대집회까지 나오고 있다. 


 어쩌면 골목길이 사라지면서부터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섞여살기엔 사회가 너무나도 풍요로워졌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은 더 많은 가치를 지불하고 안락한 공간과 분리감을 누리려 할 것이다. 차별성을 통해 삶을 안정감있게 가져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더불어살았던, 낭만에 젖은 90년대의 기억은 이제 사라졌다. 골목길이 사라지면서 골목길 동네친구도 사라졌고, 형형색색의 다양한 색깔을 뽐내던 아이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비슷한 부모, 비슷한 교육환경속에서 서로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며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 추억으로 번지는 시대가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스트코로나는 다시 컨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