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향기에 담긴 기억
학교에 눈이 내렸다. 법학관에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밖을 내다봤는데, 친구가 자기는 눈이 오면 EXO의 첫눈을 듣는다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몇 년 만에 그 노래를 들었더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 어느 학교의 낡은 복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텅 비어 있는 교실, 따뜻한 햇살,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걸음소리. 어린 시절의 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손들기 좋아하던 애였다. 반장도 몇번 했지만 아주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책장 사이에 주저앉아서 <해리포터>, <타라 덩컨>, <얼음과 불의 노래>, <드래곤 라자>, <어스시> 시리즈를 흥미진진하게 읽던 기억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 가슴 뛰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Taylor Swift의 <Lover> 앨범을 들으면 재수를 하던 그 해 여름이 생각난다. 그때 당시에도 <Lover>는 발매된 지 시간이 지난 앨범이었는데 왜 갑자기 거기에 꽂혔던 걸까? 해도 다 진 늦은 밤, 재수종합반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렇게 이 앨범을 돌려 들었더랬다. 지금이야 그 시절의 에피소드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땐 나름 걱정도 고민도 많았고 불안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에 합격해서 즐겁게 새내기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는 학원에 처박혀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었으니까... 막상 와보니 별것도 아닌데 그땐 왜 그렇게 대학이라는 두 글자가 커 보였을까? 지난한 수험기간을 무던히 잘 견뎌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에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모니터에 뜬 '합격'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던 걸 보면. 예비번호를 받아서 추가합격을 기다려야 했다면 그것도 은근 마음고생이었을 텐데, 좋은 소식을 일찍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노래뿐일까? 기억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것에는 향기도 있다. 차가운 겨울 냄새. 서늘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간질이고 지나갈 때 코끝에 맴도는 향기. 내가 좋아하는 거다. 시험기간에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을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를 때, 친구와 함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밤거리를 거닐 때,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화문을 돌아다닐 때. 그 향기를 맡으면 기억 한구석에 덮여있던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또 무더운 여름에 더 잘 느껴지는 풀잎의 향기도 그렇다.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 풍경,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배회하는 학생들, 자전거 타고 강변을 따라 달리던 기억과 숨이 차던 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현재보다 과거에 머무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것도 썩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