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춤춤 에테르 5화

by 모정연

아이돌은 모두 허상이랬다. 환상을 먹는 주제에 거짓은 발라내고 진심의 살만 골라내 사랑해주겠노라고 야심찬 착각을 했던 거다.



-바보 같은 말인 거 아는데, 가끔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나는 영화도 소설도 끝까지 보는 게 싫거든. 끝난다는 느낌을 알고 싶지 않아. 어떤 영화가 너무 좋으면 끝이 오는 게 아쉽잖아. 지금 흘러가는 시간이 나한테 그래. 너무 아깝고 아쉽고, 조금만 느리게 갔으면 좋겠고, 아니, 아, 그냥 안 끝났으면 좋겠다….



영상 마지막은 언제나 연오가 두 손으로 아쉬운 듯이 손을 흔드는 것으로 끝난다.



노트북 화면 속 연오가 무해한 눈으로 웃었다. 아직도 그 웃음이 희재 눈에는 마지막장을 열기 싫어 주저하는 청춘으로 보였다. 희재 마음과 상관없이 모니터 속 멈춘 연오는 입꼬리를 올리고 전매특허 웃음을 내보였다.



곁에 멤버도 팬도 없이 차연오는 길을 잃고 홀로 엔딩을 맞이하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빌어먹게도 속이 쓰렸다. 희재는 웅장하게 걸어가 식탁 위에 붙은 페브릭 포스터를 뗐다. 둘둘 말아 장롱 구석에 처박았다. 방에 날리는 먼지를 처분하려 창문을 열어젖혔다. 밖에서는 눈이 펄펄 날고 있었다. 꼭 그날처럼.



**



“희재님도 플로레스에요?”



오늘도 사내식당 샐러드 소스는 너무 시큼했다. 눈살을 막 찌푸릴 무렵 태훈이 물었다. 술에 취한 추자를 깨워 출근시키고 출근한 아침. 평소보다 더 퀭한 그림자 진 눈밑을 긁적였다.



요즘 세상은 난리도 아니었다. 이유는 석달 전 혜성처럼 데뷔한 대한민국 대형기획사 출신 신인 보이그룹 때문이었다. 요즘 대형기획사 보이그룹은 보통 시간을 두고 천천히 뜬다는 정설도 무시하고 데뷔와 동시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여자 아이돌도 아닌데 이렇게 대중성 높은 남자 아이돌 탄생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아닙니다.”



희재는 일갈하고 사원증을 목 뒤로 고쳐 멨다. 밥 먹을 때 거슬려서 하는 버릇이었다.



대형기획사 출신 남자 아이돌 데뷔는 요즘 뜨거운 감자였다. MZ세대나 신세대로 끼어들고 싶다면 그 그룹의 멤버 다섯명 이름 정도는 읊을 줄 알아야했다. 트렌드 고사 단골 소재로 그 그룹 사진과 멤버 이름을 매칭하는 것이나 팬덤명이 ‘플로레스’인지 묻곤 했다. 덕분에 희찬이 고욱현 라이브 방송에 출연해 차연오 들먹인 사건은 24시간도 안 돼서 묻혔다. 점심시간 회사 대화 소재거리로도 등장하지 못했다. 파동이 길게 이어지는 것도 무릇 인기의 여운인 법이었다.



텐빌스는 희재가 스물여섯이던 작년 해체했다. 지금은 희재가 스물일곱으로 넘어온지 얼마 안 된 연초였다. 텐빌스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도 텐빌스보다 유명한 아이돌들은 언제나 대여섯 팀 넘게 존재했다. 텐빌스보다 나중에 데뷔했어도 더 잘되는 팀들이 꼭 존재했다. 쉼없이 전력을 다해 달린다고 모두가 1등이 될 수 없는 세계였다. 연예계만큼 인기로 서열을 확실하게 가르는 세계도 없었다. 음악방송에서 트로피를 받지 못해 뒤에 서서 박수치는 게 익숙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희재 속도 쓰렸다.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6등과 7등.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또 앞서간다면 앞서간다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모호한 텐빌스의 정체성은 그렇게 꼭대기를 찍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어제 라이브로 미각을 잃어 뒤숭숭한 희재에게 누군가 ‘플로레스’가 아니냐고 뚱딴지같이 물은 것이다. ‘안젤로인데요.’라고 하면 ‘뭔 젤리요?’ 되물을 게 분명했다. 희재는 말을 아끼는 게 저 같은 사람에게 최대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걸 깨우쳤다.



대형기획사답게 ‘플로레스’라는 팬덤명이 정해지는데 한달 밖에 안걸렸다. 역시 철저한 기획력이 대형기획사 다웠다. 데뷔앨범은 컨셉 노래 춤 모든 게 세련되고 흠잡을 것 없었지만 희재 심장은 뛰지 않았다. 플로레스가 된다면 앞으로 성공의 궤적을 점점 더 크게 그려가는 멤버들과 행복한 나날이 예정되어있었는데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니. 본디 데뷔 직후부터 3년까지가 덕질의 황금기라는 것을 희재가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그 <되는 시장>에 마음이 내던져지지 않았다.



“희재님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단 한 번도 아이돌에게 마음 줘본 적 없는 태훈다운 발상이었다.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면 무조건 빌보드에 차트인해서 대한민국을 뒤집어놓는 유명 그룹을 좋아할 거라는 발상. 좋아하지 않아본 사람의 마음을 좋아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아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의 광적인 영역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 희재님은 누구 좋아하더라?”

“이제 그런 것 없습니다.”



바야흐로 한달 전, 텐빌스 해체 후 구할 수 없어진 초창기 리미티드 앨범이 중고 매물로 나와 빠르게 구매했었다. 급히 시키느라 기본 배송지가 회사인 걸 놓쳤다. 총알처럼 도착한 택배를 열어보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야근하느라 홀로 남은 틈에 조심조심 뜯어보던 그 순간. 지하 주차장까지 갔다가 지갑을 두고와 다시 올라온 태훈이 아는 척을 해왔다. 희재님 뭐 샀어요? 생전 첨 보는 신나는 얼굴로 커터칼 들고 박스 뜯던 희재가 신기했었다. 이미 태훈은 뜯어진 박스 안을 빼꼼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앨범이요, 떨떠름하게 답하자 태훈은 본인도 한 때 레코드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며 굳이 언박싱 현장을 함께 지켜보겠다고 책상 옆에 우두커니 섰다. 희재는 얼굴이 후끈해졌다. 앨범을 들자마자 후두두 튀어나오는 차연오 포토카드와 쌍으로 나와준 차연오 엽서카드에 기뻐 날뛸 수도 없게 태훈은 요즘은 앨범을 사면 이런 <부속품>을 주냐며 신기해했다. 이 부속품 때문에 듣지도 않는 CD가 달린 앨범을 산다는 걸 희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태훈은 ‘희재는 아이돌 팬’이라는 정보를 인풋했다. 그래서 아이돌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희재를 엮었다. 빌보드 소식이 나오면 희재님 그 그룹 어때요? 물었고 연초 열리는 가요 시상식에서 어느 아이돌 그룹이 대상을 탔다는 기사가 뜨면 그 그룹이 희재가 좋아하는 그룹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희재는 묵묵히 국만 퍼먹었다. 조금 더 사회성이 좋았더라면 대화를 우회할 수 있었을 테지만 희재는 그런 게 부족했다. 불편한 사람들과의 대화에 굳이 우스운 농담을 섞지 않았다.



희재 회사는 수평적 기업문화를 지향하겠다며 전사적으로 직급을 없앴다. 희재 입사 직전의 일이었다. 태훈은 희재보다 바로 앞 기수에 입사한 반년 선배였다. 입사 기수로 따지면 직속 사수인 셈이었다. 같은 3년차 희재는 모두에게 깍듯했고 태훈은 모두에게 살가웠다. 희재 모서리를 사포로 살살 갉아 만든 게 태훈 같달까.



태훈은 농담이랍시고 <희재님은 꼭 군대 후임 같아요.> 했었다. 다나까로 어미를 종결하는 희재에게 보내는 친해지려는 신호였는데 희재는 <군대는 안 다녀왔습니다.>로 받았다. 여자인 희재가 군대 안 다녀온 것 정도는 태훈도 아는데 그런 식으로 대화는 묘하게 엇갈렸다. 이쪽에서 유머라고 던지면 저쪽에서 죽자사자 진담으로 받았다. 회사 사람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희재의 선 긋기 방법이었다. 희재 말투가 워낙 ‘인터넷 사람, 오타쿠’ 같다고 추자는 예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추자는 특훈으로 입사하는 회사에서는 다나까로만 말하라고 처방했었다. 그것대로 실천한 부작용이 오타쿠는 아니되 군대 막 제대한 군기 잔뜩 든 모습이었다. 본인이 걷는 방향을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사람. 태훈 눈에 보이는 희재였다. 그래서 태훈은 희재의 그 방향이 자주 궁금했다. 태훈은 태생적으로 사람에게 관심 많고 물음표가 많은 인간이었고 희재는 태생이 마침표 찍기를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아 맞다, 이번에 라운딩 나가는 거 일정 언제라고 그랬지?”



또 다른 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때 희재는 숙주나물을 면발처럼 삼켰다. 오늘따라 참 짜게 무쳐졌다. 사람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매번 똑같겠나. 그래도 싱거운 것보단 짠 게 낫다. 올라가자마자 텀블러 하나에는 물을 가득 담고 하나에는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내려 마셔야지. 야무진 계획을 세우며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들끼리의 골프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래서 희재님은 우리 라운딩 동아리 언제 가입할 거예요.”



또 타겟이 희재가 됐다. 웃음 섞어 재영이 물었다. 재영은 이 팀에서 팀장 다음 직급이었다. 수평적 기업 문화답게 직급은 없고 누가 가장 팀장 근사치에 도달했는지 눈치로 느꼈다. 회사가 없앤 직급인데 팀원들은 재영을 대외적으로 부팀장으로 불렀다. 나이순으로 재영이 팀장 다음 따봉이었다. 재영은 부팀장의 덕목으로 팀원 모두를 살뜰히 챙겼다. 소외를 자처하는 건 언제나 희재였다. 재영은 요즘 본인이 가입한 사내 골프 동아리에 결원이 생겼다고 난리였다. 팀에서 유일하게 소속 동아리가 없는 희재가 타겟이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4화춤춤 에테르 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