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도 추자처럼 취하고 싶었지만 술은 싫었다. 담요를 가져와 추자 어깨에 덮어줬다.
“응 엄마.”
때마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핸드폰을 어깨에 받쳐들고 희재는 방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을 켰다.
“추자 늦었는데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해. 엄마 오늘 이모네서 자고 갈 테니까.”
“응. 알겠어. 고마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추자가 이렇게 늦게 오는 거 오랜만인 거 같은데.”
“일은 무슨. 그냥 오랜만에 같이 회사 욕이나 하려고 그러는 거지 뭐.”
전화 끊은 희재는 마우스를 잡고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오늘은 오롯이 추자와 함께 사랑의 비관적 말로에 취할 수 있는 밤이 됐다. 기사 몇 개를 검색하다 결국엔 유튜브로 돌아왔다. 언제나 보는 마지막 영상을 재생했다.
[190827 연오 진대타임]
검색창에 190827까지만 치면 알아서 뒤가 자동 완성됐다. 이 팬메이드 영상 조회수 지분의 3할 정도는 희재였다. 3분짜리 클립 영상을 재생했다. 각자 거울이 달린 포근한 소파에 앉아 멤버들은 텐빌스 아이돌 생활에 대해 고백하는 기획 영상이었다. 화면엔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연오가 가득 찼다. 자막으로 질문이 뜨면 연오가 그것을 읽고 친근감을 위해 반말로 답하는 단순한 플롯.
Q : 연오에게 지금 가장 행복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줘.
-음 글쎄. 일단 오늘을 예시로 들면 아침으로 차에서 먹은 김밥이 좀 안 좋았는데. 소화제 먹기에는 애매한 거야. 다들 점심 시킬 때 나는 조용히 산책하고 오면 좋을 거 같아서 회사 밖으로 나갔었어. 매니저 형한테만 말하고. 다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멤버들은 엄청 바빴거든. 회사 앞 골목을 막 지나가는데 누가 뒤에서 뛰어서 따라오는 거야. 내 어깨를 누가 탁 잡아서 돌아보니까 희찬이더라고. 밥 안 먹고 어디 가냐면서, 내가 어디 안 좋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바로 알고 따라와준 거야. 이런 친구들이 내 옆에서 계속 같이 산다는 게 가끔은 실감이 안 날 때가 있어. 희찬이는 우리 멤버 중에 유일하게 나랑 동갑이잖아. 그래서 서로 더 표현 같은 걸 사실은 더 안 해. 아까도 그냥 좀 걸으려고 나왔다고 얼버무리니까 희찬이가 그럼 같이 걷자고 따라와줬어. 희찬이가 까불까불해보여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 희찬이는 누가 컨디션이 가라앉으면 제일 잘 알아채고 신경 써줘. 그래서 아까 같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공원을 삼십분 넘게 걸었어. 아무 얘기 안 해도 편한 사이 있잖아. 나랑 희찬이는 오히려 시끄러운데 있다가 둘만 있으면 고요해지거든, 가끔은 그 적막이 너무 편해.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고맙다고 했는데. 걘 내가 막상 그렇게 말하면 은근히 대답도 잘 못해. 돌고 오니까 기분도 다시 맑아졌어. 아마 혼자 돌았으면 그 정도로 상쾌하지 않았을 것 같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희재는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곱씹듯이 살짝 고개 숙인 연오의 모습을 바라본다. 언제나 이 부분에서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심호흡이 필요했다. 여전히.
잠시 숨을 고른 희재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언제나 그렇듯 모니터 안에서 차연오는 언제나 침착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지고 손가락 끝을 만지작대며 카메라 앵글을 피한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셋둘하나 이제는 익숙해져 너덜너덜하게 닳은 그 타이밍에 고개를 든다. 눈 마주친 연오가 수줍은 고백처럼 뒷 이야기들을 잇는다. 이미 외울만큼 익숙한 이야기인데도 저 목소리를 들을 때면 끝도 없는 멘홀 아래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차연오는 누군가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드는 위력이 있다. 지금도. 희재는 다시 그 이상한 나라로 빨려들어가 수 천번 들어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귀기울인다.
Q : 멤버들이랑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더 많을 것 같은데 궁금해.
-아 그렇지, 그런데 잠깐만, 나 아직 앞 질문에서 행복한 것들에 대한 대답을 다 못했는데, 더 해도 돼요? 한 번에 해야 되는데 죄송해요. 근데 이건 꼭 말하고 싶어서요…. 가끔 새벽에 팬분들 안젤로랑 라이브 방송하거든요. 아 맞다. 네 존댓말이 자꾸 나와서. 반말로. 다시 다시. 우리 팬분들도 야행성이 많아서 낮보다는 밤에 하는 라이브가 좋다고 그랬거든. 방송을 길게는 못해. 다음날 안젤로들 학교랑 회사 보내야되니까. 내가 좋아하는 새벽 시간에 라이브 하면서 댓글로 안젤로들이 하루 어떻게 보내고 어떤 거 때문에 속상했는지 말 해주고. 내 하루도 어땠는지 얘기해주고 우리 내일도 같이 힘내자고 하면서 끄거든. 각자 다른 하루 보내고 잠들기 전에 내일도 힘내자고 얘기하는 게 의미 있어. 같은 새벽을 보낸다고 생각될 때 내가 살아있는 거 같아. 물론 사람이 매일 살아있다는 거 나도 아는데. 팬들이랑 같이 공연하거나 얘기할 때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팬들도 그 시간에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꼭 받았음 좋겠어.
Q : ‘살아있다는 것 같다’는 말이 너한테는 ‘행복하다’는 의미인 거야?
-맞아. 근데 좀 더 많이 행복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야. 좀 더 멋있는 표현법을 내가 공부해볼게. 근데 살아있다는 감각이 뭔지 그때 느끼는 거 같아. 나는 특히 팬들이랑 우리끼리만 있다고 생각 들 때 좋더라고. 오늘 서로 어떤 하루 보냈는지 얘기하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 연결돼있는 것 같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만약에 혼자라고 생각 드는 안젤로가 있으면 나도 알려주고 싶어. 나도 우리 팬들 하루 잘 보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우리 앞으로도 서로 하루 잘 보냈는지 밤마다 안부 물어봐주자고. 나쁜 일 있었으면 밤에 차연오한테 말하고 털어야겠다, 그렇게 서로가 일상 속에 좀 더 자연스러운 존재로 남았으면 좋을 거 같아. 이런 게 행복이지 않을까? 그리고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방향을 안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같아.
Q : 무슨 방향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줘.
-혼자 있으면 가끔 방향감각을 잃을 때가 있는 거 같아. 그럴 때 희찬이나 멤버들이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저기야.’ 알려주거든. 혼자가 아니라 멤버들이랑 같이 걸으니까 잠깐 방향을 헤맬 수는 있어도 금방 다시 찾아. 팬분들도 우리한테 나침반이기도 해. 우리 목적지를 계속 알려주는 건 팬분들이거든. 서로가 있어서 아무리 먼 꿈이라도 같이 걸으니까 길을 잃지 않는 거 같아. 우리 안젤로들이 각자 꿈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도 꼭 같이 힘을 주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
Q : 팬들이랑 일상을 나누는 게 그런 ‘꿈을 찾아가는 긴 여정’의 에너지를 채워서 좋다는 거지?
-맞아. 멤버들 말고는 팬들이 내 친구야. 친구라는 건 서로가 꿈을 향해 다가가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안젤로 덕분에 내가 배운 행복이랑 우정의 정의야.
Q : 언제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많이 말하는 거 같아. 다른 멤버들보다도.
-나도 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많이 말하는 사람이 될 줄 몰랐어. 데뷔하고 가장 많이 바뀐 점이야.
Q : 데뷔하지 못했다면 지금 차연오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이어지는 침묵.
-음……. 그거 꼭 대답해야돼?
Q : 안젤로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상상도 하기 싫은데. 데뷔를 만약에 못 했으면. 그랬으면…, 행복 같은 건 모르고 살았을 거야. 살아있다는 감각이랑은 아주 많이 멀었을 거 같아. 무대에 있을 때 살아있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은데, 그걸 모르고 사는 거잖아. 무대에서 팬들 보면 그때 찰나인데 나 지금 살아있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 내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정확히 표현이 너무 어려운데.
데뷔한 것이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하던 차연오였다. 희재에게는 그것이 마치 데뷔 이전에는 살아있다는 감각이나 행복과 동떨어져 살았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 마음 시큰해지는 인터뷰였다. 멤버 중 유일한 동갑내기인 희찬과 연오는 유독 에피소드가 많았다. 텐빌스에서 가장 인기 많은 두 사람이라 팬들이 유독 둘의 우정을 연호하기도 했지만 그에 화답하기 위한 관계라기보단 내색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깊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을 그리는 노래를 희찬이 작사작곡해 앨범에 담은 적도 있었다.
텐빌스 해체와 동시에 차연오는 종적을 감췄다. 그런 차연오를 두고 오늘 주희찬은 그가 처음부터 연예계 생활에 학을 뗐다며 만취한 채 폭로를 전한 거였다.
-팬분들은 지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다 아실 거야. 알 거라고 생각해. 꼭 알아주실 거라고.
그 말을 하는 동영상 속 연오가 희재를 바라봤다. 더 정확히는 카메라 렌즈와 눈 맞춘 거겠지만. 희재는 다시 한 번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