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저는 골프에 도저히 관심이 없어서요.”
“그럼 대체 주말에 뭐해요 희재님.”
조직개편이 되면서 모두가 같은 팀이 된 지 이제 몇 달 안 됐다. 재영 입장에서는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유일하게 사내 동아리에 가입 안 한 희재를 챙겼다. 희재는 목을 감싼 사원증을 만지작댔다. 어색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추자 말론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단다. 누가 불편하게 말을 걸면 손에 아무거나 잡고 만지작댄다고.
“이거 저거 합니다. 하하.”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성 기르는 법에 관심 없는 희재는 억지로 웃음을 덧붙여가며 답했다.
회사 사람 절반이 가입해서 친목 쌓는 골프 동아리에 가입할 돈도 여유도 없었다. 회사 지원비보다 초과되는 금액으로 골프복부터 골프채까지 온갖 준비물을 살 돈도 없었고 그런 것에 돈을 지불해가며 그들과 우정을 쌓고 싶지도 않았다. 골프채 휘두르며 완성되는 우정이라면 애초에 다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동아리 가입하면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좋아요. 주말에 심심한 사람들끼리!”
“네 골프에 관심 생기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른 이놈의 회사 때려 쳐 버려야지. 숟가락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조직 개편 이후로 갑자기 팀이 된 조직원들끼리 팀워크가 중요하다며 매주 두 번 팀점심을 하자고 제안한 것도 재영이었다. 태훈 같은 사람은 얼씨구나 좋아했다. 참 뭣 같은 룰이구나. 희재는 늘 똥 씹은 얼굴로 끌려다녔다.
“안 되겠다! 내가 우리 희재님 앞으로 골프 동아리에 열심히 꼬셔봐야지.”
희재 등골 써늘해지는 다짐을 하며 재영이 후식으로 나온 요플레를 뜯었다. 희재는 티 나지 않게 귓바퀴를 긁었다. 이것도 추자가 늘 지적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싫어하는 사람이 본인 이름 부르면 희재는 늘 귓바퀴를 만진다. 귓속에 담긴 낯선 목소리를 털어내듯이.
골프 안 치는 희재의 주말은 언제나 바쁘고 정신 없었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일수록 소수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인생의 큰 기둥인 법이었다.
**
골프 라운딩 대신 희재는 추자의 차에 탄 채 아침부터 공항에 도착하며 주말을 맞이했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던 희재가 구름같이 몰린 인파에 하품하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연예인 출국하나 보네.”
창밖 풍경에 익숙하게 핸들을 돌리던 추자가 읊조렸다.
공항 입구에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선 수많은 팬들과 그 옆에 라인을 만들고 선 기자들이 보였다.
“쟤네 다 플로레스인가보다.”
현수막을 귀신같이 알아본 추자가 말했다.
“김추자 너 저게 플로레스인지 어떻게 바로 아냐?”
희재가 바로 경계했다.
“저 그룹 막내 별명도 토깽이랜다. 저기 토깽이 현수막 보여서. 주희찬 그 새끼랑 별명이 겹치잖아. 그래서 알아.”
“토깽이는 개뿔! 지금 생각해도 주희찬 걔가 무슨 토끼라고! 어떤 토깽이가 그렇게 술주정뱅이냐!”
“그러게. 토끼가 다 얼어 죽었지. 나 요즘 토끼한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잖아. 토끼 살리기 동호회나 만들까봐.” 야외주차장에 주차한 추자가 파킹 기어를 넣으며 중얼댔다.
희재도 밸트를 풀었다. 두 사람은 기자들과 플로레스 인파로 북적이는 곳을 지나 내부로 걸어갔다. 허허벌판마냥 드넓은 공항에서 헤매지 않고 추자가 손을 번쩍 흔들었다. 저 멀리 실루엣 하나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희재도 그를 향해 반가움에 뛰었다. 직장인에게 꿀 같은 주말을 공항으로 달려오게 만든 오늘의 주인공.
“짐이 고작 이게 다야?”
희재의 물음에 공찬이 작은 트렁크 하나를 들어보이며 어깰 으쓱했다. 그는 얼른 손에 들고있던 봉지를 희재에게 건넸다. 그 안에서 금방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너희 주려고 샀어. 이따 집 갈 때 먹으면서 가.”
공찬의 말에 추자가 떠나는 놈이 가지가지 한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성공찬. 아버님이 취업하라고 구박하면 바로 전화해. 서울로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고. 우리 분식집에 너 하나 잠들 방 못 만들어주겠냐.”
희재의 말에 공찬이 고개까지 젖혀 웃었다. 추자는 공찬이 준 봉지를 벌려 도넛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잠깐 커피 마실 시간 되면 커피나 마실래?"
추자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바로 앞 스타벅스로 향했다. 셋 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입구에 자릴 잡고 앉았다. 공찬이 손목시계를 봤다. 수속 전까지 이십분 정도 남았다고 했다.
“잘 지내고. 연락 자주하고.”
“고희재 너 지금 그 말만 스무 번째야. 누가 들으면 성공찬이 어디 미국이라도 가는 줄 알겠어. 고작 제주도 가는 거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간다고. 궁금하면 우리가 얼마든지 가도 된다니까.”
“비행기 타고 삼십분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니냐? 네 코가 그렇게 크세요? 공찬아. 김추자 얘가 이렇게 정이 없다.”
공찬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웃음이 터져 혀를 델 뻔했다.
“누가 나랑 같이 개발하기로 한 어플에서 손 떼서 어쩔 수 없이 고향 내려가는 건데. 추자야 누가 들으면 고희재가 나 엄청 걱정하는 거 같다. 그치.”
공찬의 말에 희재는 할 말이 없어진다. 희재는 안경알에 낀 뜨거운 김을 손톱으로 긁었다.
“고희재 지금 차연오한테 완전히 정 떨어져서 그래. 네가 이해해. 실연의 상처, 뭐 그런 거야. 냅두면 알아서 회복돼.”
“알아서 회복은 개뿔! 나 이제 차연오 다신 안 좋아할 거야!” 희재가 빽 받아쳤다.
“차연오 개자식!”
부러 객기처럼 희재가 말했다. 와중에도 음성이 넓게 안 퍼지게 작게 웅얼대는 꼴이 퍽 우스웠다. 하얗게 김 서린 안경을 쓰고 음침한 발성으로 내뱉는 말에 추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성공찬 결심이 기특하네. 난 너희 둘이 대학 때부터 그 이상한 어플 만든다고 할 때 그게 되겠나 싶었는데. 그걸 진짜 하겠다고 결심해서 고향으로 떠나고. 역시 성공찬 너도 범상치 않은 놈이야.”
추자의 짧은 소회를 덮어버릴 만큼 시끄러운 웅성거림이 공항 안으로 옮겨왔다.
“연예인인가.”
구름 같은 인파에 둘러싸인 무리를 보며 공찬이 멍하니 감탄했다. 주변이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스타벅스 안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밖을 힐끗댔다. 뻔한 관심과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쪽으로 옮겨붙었다.
“위치드라고 대형기획사에서 새로 데뷔한 남자 아이돌. 요새 쟤네가 제일 잘 나가. 쟤네도 제주도 가나보다. 성공찬 너랑 같은 비행기 타는 거 아니야?”
추자의 농담에 공찬이 다 마신 컵을 트레이에 올렸다. 공찬은 언제나 뜨거운 걸 빠르게 잘도 마신다.
“추자 너 저 그룹 좋아해? 되게 잘 아네?”
공찬이 추자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저기도 토깽이가 있어서. 아무튼 됐고. 그만 일어나자. 시간 다 돼가.”
그 토깽이가 저 토깽이와 무엇의 차이가 있는지 모르는 공찬에게 설파하는 건 시간 낭비다. 추자는 도넛 먹느라 설탕 묻은 손을 티슈로 닦고 일어섰다. 아직 희재 머그 안에는 아메리카노가 제일 많이 남았다. 공찬은 일어서지 않고 그런 희재를 기다렸다. 무리해서 빠르게 마시려고 노력했는지 희재 윗입술이 그새 퉁퉁 불었다.
“희재 다 마실 때까지만 기다리자. 다 마시고 일어나도 돼.”
공찬의 배려에 추자가 고개를 들이밀어 희재 머그 안을 살폈다.
“얘 다 마시려면 한참 남았어. 테이크아웃 잔에 그냥 받고 일어나자. 성공찬 이러다 비행기 놓쳐. 그러게 애초에 차가운 걸 시키지. 뜨거운 거 먹지도 못하는 애가 왜 이걸 시켜서 입술만 혹사시키냐.”
끌끌 추자가 혀를 찼다. 금방 불어버린 희재 입술이 우스운지 공찬은 티슈나 건넸다. 트레이에 모든 것들을 담은 추자가 들고 일어섰다. 종업원에게 부탁해 희재 남은 커피를 종이컵에 야무지게 챙겼다. 그러는 동안 희재는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성공찬. 잘 살아.”
“나 뭐 영원히 안 볼 거야? 어플 만들면 금방 돌아올게.”
“어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짜식아.”
시끄러운 인파 소리에 희재 농담도 묻혔다. 공찬도 저 소리 속으로 섞여야 할 시간이었다. 종이잔에 남은 커피를 담아온 추자가 희재에게 내밀었다.
“제주도 따분하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코딩하다 막히면 전화하고.”
커피를 들고 나오며 희재가 마지막 잔소리를 늘어놨다. 귀여운 허세에 추자도 따라 웃었다.
“응 연락할게. 오늘 배웅 나와줘서 고마워.”
공찬이 웃으며 돌아섰다. 질질 끌리는 트렁크 바퀴 하나가 고장인지 회전하지 않아 쩔쩔맸다. 이내 말썽인 바퀴에 트렁크 손잡이를 짧게 빼낸 공찬은 번쩍 들고 걸었다.
“아버님 서점에 재밌는 책 나오면 전화해! 사러 갈게!”
희재의 큰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까지 다 돌아볼 정도였다. 공찬이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가느라 약간 붉어진 얼굴로 돌아서서 끄덕였다. 먼 거리도 아닌데 쩌렁쩌렁 공명하는 희재 목소리에 추자가 어깨를 툭 쳤다.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그 잔소리에도 저 멀리 선 공찬은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