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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비혼 여성이 경험한 대기업

ft. 회사 욕 하면서도 다니는 이유

by 조기은퇴러

*써놓고보니 비혼여성의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한 것 같다. 기억에 남을 만한 혜택이나 불이익을 본 경험은 없다. 이직할 땐 기혼이 아니라 오히려 더 쉬웠던 것 같고,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성선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일 것 같고. 이 부분은 더 고민해 봐야겠다.



커리어 계획도 없었고, 회사생활의 목표도 없었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잡고, 잡을 수 없는 기회엔 마음 덜 아파하기 위해 노력했더니 어느 내 나는 두 곳의 금융사를 경험한 30대 중반(!) 9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9년째 다니다 보니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브런치까지 시작했지만 아직도 조용히 이놈의 회사를 다니며 이직 시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회사를 참고 다닐 만큼의 월급을 받기 때문이다.



일단 대기업은 초봉이 전체 평균보다 높다.(대기업 공채로 입사했던 나의 첫 해 계약 연봉은 4,060만 원이었다.) 또한 직급, 고과에 따른 연봉 테이블이 있다. 승진할 때마다, 매해 좋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기본 연봉이 상승한다는 말이다. (나의 2년 차 계약 연봉은 4,280만 원이었다. 평가는 평균 수준이었으므로 물가 상승분만 반영되었을 것이다.)

노조가 있거나 어느 정도 회사 규모가 있어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대기업은 추가로 매년 물가상승률이 맞춰 또 올려준다. (물론 실적이 좋지 않은 해는 임금이 동결된다.)


전화영어, 자기 계발 교육, 도서구입비, 복리후생비 등 복지제도에 전세대출 지원도 있다. 비혼 여성이라면 받기 힘들지만 자녀 학자금 지원(무려 대학까지! )에, 육아휴직 및 임신기간 단축근무도 당당히 쓸 수 있다. 회사 복지의 큰 부분은 여전히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기혼자에게 맞춰있다. (아무리 자기계발지원 받아봤자 대학등록금과 비교하기 어렵다)


거기에 ‘금융’이 붙으면 월급을 더 주더라. (삼성전자, 정유회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 금융업을 하려면 금융위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신규 진입이 제한된 과점 시장이고, 기존 플레이어들은 어느 정도의 파이를 보장받는다. 또한 깔아놓은 시스템을 기반으로 중개 수수료(대출수수료, 결제 수수료 등) 받아먹는 구조이므로 인건비, 판관비 외엔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물론 디지털 시대엔 정기적인 시스템 개편이 필요하지만 제조업엔 비할 바가 못 되므로 월급을 많이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는 조달금리까지 낮아 영업비용이 낮아지고, 고갱님들이 알아서 대출받아 주식거래하시고 카드결제해주시니 성과급도 잘 나온다. 내가 다니는(다녔던) 회사들은 좋을 땐 연봉의 20~30% 이상이 성과급으로 나왔다.


하지만 대기업(이라 쓰고 내가 다닌 두 회사)은 월급을 주고 쿨하진 않았다. 월급은 매주 40시간 뿐만 아니라 ‘행동의 자유, 커리어 개발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다.



대기업은 오래된 회사이고, 오래 다닌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잘했기 때문에 지금의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하직원에게 그들의 방식을 따르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aka 꼰대)



52시간제 도입과 밀레니얼 세대의 유입, 코로나 덕분에(재택근무, 혼밥 문화, 회식 금지가 대기업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바뀌고는 있다지만, 대졸 공채가 없어지는 추세에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기득권층이다. 까라면 까야 되고, 가기 싫은 회식에 가야 하는 문화를 참기 어려운 사람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버티기 힘든 곳일 수 있다.



또한 대기업에서 커리어 개발은 종종 장애물에 부딪친다.

50세도 못 채우고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한다는 건 차치하자.


우선 분업화된 구조는 프로젝트의 1부터 10까지 한 사람이 경험하기 힘들게 한다.


과점시장에서 편하게(?) 영업하고 있는 덕에 회사의 방향은 윗사람들 입맛에 따라 굴러가게 된다. 자연스레 직원의 커리어와 상장에 도움이 되는 업무는 하지 못하고 쓰잘데기없는 관리성 업무와 문서작성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토스와 카카오뱅크 이전 구리고 복잡했던 금융앱의 UI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나 그런 구린앱 만들었어요 라고 이력서에 쓰면 경력이 될까?)


‘직무순환제도’라는 미명 아래 한 팀에 오래 있으면 갑자기 읭스런 팀으로 일방적인 발령을 내기도 한다. 이는 ‘커리어가 꼬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재의 회사를 백 년 만 년 다닌다면 회사 전반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겠지만 이 회사가 나에게 정년 보장을 해줄지도 모르고, 이직을 하게 된다면 버려야 하는 경력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본인의 직무가 매우 전문성 있거나, 전문가로 인정받거나, 경력직으로 입사라면 직무 순환은 피할 수 있으나, 이럴 경우에도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나는 행동의 제약을 수용할 만큼의 내 기준에 맞는 월급을 받고 있고, 커리어 개발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얻어냈다. 내가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얻고 있는지 명확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것을 얻고, 회사를 미련 없이 그만두기 위해 조기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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