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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저자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 번역 용경식 / 출판 문학동네

by 큰구름

열네 살 소년 모모가 들려주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의 비밀을 담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1980년 의문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두 번째 소설이다. 어린 소년 모모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악동 같지만, 순수한 어린 주인공 모모를 통해 이 세상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자기의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살고 있는 열네 살 모모의 눈을 통해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바라본다. 모모의 눈에 비친 세상은 결코 꿈같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인종적으로 차별받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유대인, 살아가기 위해 웃음을 팔아야 하는 창녀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노인, 한 몸에 여성과 남성의 성징을 모두 갖고 있는 성전환자,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모모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한,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그들 자신도 스스로를 소외시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버림받은 사람들, 소진되어 가는 삶에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랑에 가득 차서 살아간다. 그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유태인 로자 아줌마를 비롯해 이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소년을 일깨우는 스승들이다. 이들을 통해 모모는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동시에, 삶을 껴안고 그 안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는 법을 배운다.


★ 5


∎읽은 소감

생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모모는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어른이 썼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 묘사가 정말 풍부하다. 마음이 아릿하고 저려오며 아이의 순수함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위화의 인생이란 소설과 나라와 시대만 다를 뿐 같은 물음을 던져주었던 것 같다. 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인상 깊었던 문장

p.213

“꿈을 꾼 거예요. 아줌마, 꿈 좀 꾸었다고 해서 큰일 날 건 없으니까 안심해요.”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모모야, 사실대로 말해줘.”“진실만을 말한다고 맹세할게요.” 아줌마 아줌마는 암에 걸리지 않았대요 카츠 선생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이제 안심하세요. “

그녀는 약간 안심하는 듯했다. 암이 아니란 건 좋은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이러고 서 있었던 거냐고!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냐, 모모야? “아줌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아줌마는 그걸 좋아했다. 그녀는 금세 미소를 지으면서 내 얼굴이 좀 더 예쁘게 보이도록 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사는 게 원래 그런 거래요 그러면서도 오래 살 수 있대요 카츠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줌마 나이에는 다들 그런대요. 선생님은 그런 나이에 번호를 붙여서 불렀어요. "


∎이유

모모를 평생 돌보았던 아줌마와의 입장이 뒤바뀐 장면이다. 무엇보다 모모는 아줌마를 사랑하며 이해하며 아낀다. 모모에 대한 사랑을 서투르게 표현했던 아줌마에 비해 모모의 사랑은 너무나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어른과 아이가 뒤바뀐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모모의 모습 속에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의 인격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모의 사랑은 이렇듯 배려가 넘친다. 그리고 친절하다. 그렇기에 더 슬펐다.


논제 1.

모모의 이웃에 사는 왈룸바씨와 일행들은 로자아줌마를 위해서 아프리카 전통춤을 추며 의식을 행해줍니다. 그러나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을 보며 “자기네 나라에서는 노인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이 파리 같은 대도시”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하죠. 프랑스는 노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그저 방치해 둔다고도 합니다. 고향인 가봉에서는 종족 단위로 모여 살면서 노인들이 많은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프랑스가 개인주의화 되어 노인들이 보잘것없는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남에게 도움도 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왈룸바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셨나요?


<음식을 먹으면서, 왈룸바 씨는 자기네 나라에서는 노인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이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대도시에는 도로도 많고 층계나 구멍도 많고 노인을 잃어버리기 딱 좋은 장소들이 많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노인을 찾아달라고 군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P.196)

프랑스와 같이 크고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노인들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노인들은 더 이상 일도 할 수 없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으므로, 그저 방치해 둔다는 것이다.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종족 단위로 모여 사는데 노인들이 인기가 많다고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인들이 죽어서도 종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개인주의 때문에 종족이 없다. 왈룸바 씨는 프랑스에서는 종족이 완전히 해체되었고, 그 대신 떼강도들이나 모여 일을 모의하고 저지른다고 했다. (중략)

그들이 거기, 엘리베이터도 없는 보잘것없는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그들이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소리쳐봤자 너무 힘이 없어서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했다.>


개인주의에 자본주의 사회가 더해진다는 건 소수여야 좀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의미하는 듯하다. 그저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 좀 더 넓게는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 농경사회처럼 대가족의 큰 장점이 자본주의 개인주의에서는 큰 단점으로 다가온다는 걸 의미한다. 자연스레 일할 능력이 없고 돈이 없는 노인들은 돈이 제일 중요한 자본주의에서 밀려난다. 죽을 때까지 자손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면 안 된다는 말이 진리인 듯 다양한 패륜의 사건들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자본주의가 잘 될수록 개인주의가 팽배해질수록 복지가 중요하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고 그것이 사회다 누구도 돈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자라는 건 그만큼 가난한 이들의 몫까지 가져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부자들의 사회적인 복지 활동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논제 2.

모모는 카츠선생님에게 로자 아줌마를 안락사시켜 달라고 말합니다. “로자 아줌마가

자결하고 싶다면 그건 아줌마의 권리”라고 말하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인

로자 아줌마를 식물인간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좋은 일 한번 해 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생에서 구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모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셨나요.?

<“신성한 민족자결권이란 게 있어요, 없어요?” “물론 있지.”

그는 나를 내려다보기 위해 앉아 있던 계단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물론 있단다. 그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하지만 그게 지금 로자 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건요, 만약 그런 권리가 있다면 로자 아줌마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신성한 자결권이 있다는 거죠. 아줌마가 자결하고 싶다면 그건 아줌마의 권리라고요. 그리고 아줌마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어야 해요. 유대인 배척주의에 걸리지 않으려면 유대인 의사가 필요하니까요. 유대인끼리 서로 괴롭히면 안 돼요. 그건 정말 구역질 난다고요.”

카츠 선생님은 점점 더 한숨을 몰아쉬고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맺혔다. 그 정도로 내가 말을 잘했던 것이다. 내가 네 살 더 먹은 구실을 제대로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략)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대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자리엘 붙어 있는 진자 유대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러운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 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중략)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럼 범죄라고요...”> (p.264~265)


안락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안락사라는 건 생명이 자기 것이기에 죽을 권리 또한 누리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한다면 죽음이라는 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권리라는 말과 같다.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생명문제만은 자기 자신은 포기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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