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떼기2_ 김밥을 싸는 이유
#1
“세속적인 음식... 떡볶이 시켜 먹어도 되나요, 엄마?”
어제 낮, 볼펜 리필심을 부탁하는 카톡이 와 있길래 ‘먹고 싶은 음식’을 물었더니 이렇게 답이 왔다. 아이는 자가격리 중이다. 코로나19 PCR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기는 했지만, 같은 반 친구가 확진이 되었으니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가 있을 만한 곳이 있어서, 남편과 아이는 2주 동안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음성이기만을 바랐는데 결과가 나오고 나니 이런저런 잔걱정을 하게 된다. 제시간에 일어날까, 원격수업에 늦지 않게 들어갈까, 생활 리듬 또 깨지겠네, 무슨 음식을 어떻게 갖다 줄까... 그중 가장 큰 걱정은 단연코 ‘먹을 것’이다.
‘세속적인 음식이라고?’
허술한, 그러나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난다.
‘‘세속적인’의 반대말이 뭐지? 종교적인? 그럼 내가 하는 음식은 ‘종교적인’ 게 되나? 세상에, 종교적인 음식이라니!’
‘그런 그렇고, 바로 옆 방에 아빠가 있는데 왜 이걸 나한테 허락받는 거야?’
다시 한번 웃는다.
#2
남편과 아이가 집에 없는 토요일 아침, ‘세속적’의 반대말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답적’이라고 알려 준다.
고답적: 속세에 초연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내 음식은, 그리고 내 양육은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세속적’이라는 단어가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웃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겨냥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잦았던 작년, 아이의 생활 리듬을 두고 마음을 끓였다. 그러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나 횟수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아이와 나는 충돌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마음속으로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망설임은, ‘주말이나 방학엔 나도 그렇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며 지내고 싶으니까’라는 생각으로 토닥토닥 덮어버렸다.
정해진 시각에, 이왕이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다.
이 한 문장을 버리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이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내가 얻은 것, 그런 것들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 나눌 때가 올까? 먼 훗날 언젠가 올 수도 있고,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이제야 느끼는 것들을 부모님께 굳이 말씀드리지 않는 것처럼, 나를 많이 닮은 이 아이도 깨닫게 되더라도 입에 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내 눈빛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두 분이 아시는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서 그런 눈빛을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3
그 이후로 나는 휴일 아침이면 종종 김밥을 싼다. 밥 먹으라고 깨우는 것에 지쳐서 시작된 고육지책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 식사를 준비하는 호젓함도 좋고, 나름의 순서대로 재료를 준비해서 세팅해 놓고 ‘자 이제 말아볼까’ 할 때 내가 느끼곤 하는 좀 어이없는(주부가 된 것 같은) 성취감도 좋고, ‘이번엔 재료들이 가운데 딱 오게, 단단하게 말 수 있을까’하며 여전히 긴장해서 도전하는 마지막 과정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김밥을 싸 두면 ‘각자 알아서 먹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밥을 싸 둔 토요일 아침이면 나는, 부담 없이 산책을 나서거나 내 방에 틀어박힌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감각 중에 ‘도마질 소리’가 있다. 어느 여름 아침이었던 것 같다. 밤새 조금 덥게 잤는지 내 몸엔 땀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창문을 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할머니는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올려 주셨고, 부엌에서는 엄마의 도마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닿던 까슬한 감촉, 잠결에 들려오던 그 규칙적인 소리에 담겨 있던 속도감과 리듬감, 그것이 주던 뭐라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기억한다.
그때의 엄마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내 손은 그런 도마질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어설픈 내 손길에 ‘엄마의 마음’이 들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이 들어 있으니 내 음식은 종교적인 음식이 된 거라며 혼자 키득거린다. 큰아이가 좋아하는 청양 고추지 김밥,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 김밥, 우리 모두 좋아하는 치즈김밥을 싸서 유리 용기에 차곡차곡 담는다. 토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