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ia 윤집궐중 Oct 30. 2021

12. 세속적인 떡볶이, 종교적인 김밥

눈발떼기2_ 김밥을 싸는 이유


#1


“세속적인 음식... 떡볶이 시켜 먹어도 되나요, 엄마?”     


어제 낮, 볼펜 리필심을 부탁하는 카톡이 와 있길래 ‘먹고 싶은 음식’을 물었더니 이렇게 답이 왔다. 아이는 자가격리 중이다. 코로나19 PCR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기는 했지만, 같은 반 친구가 확진이 되었으니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가 있을 만한 곳이 있어서, 남편과 아이는 2주 동안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음성이기만을 바랐는데 결과가 나오고 나니 이런저런 잔걱정을 하게 된다. 제시간에 일어날까, 원격수업에 늦지 않게 들어갈까, 생활 리듬 또 깨지겠네, 무슨 음식을 어떻게 갖다 줄까... 그중 가장 큰 걱정은 단연코 ‘먹을 것’이다.    

  

‘세속적인 음식이라고?’

허술한, 그러나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단어 선택에 웃음이 난다.

‘‘세속적인’의 반대말이 뭐지? 종교적인? 그럼 내가 하는 음식은 ‘종교적인’ 게 되나? 세상에, 종교적인 음식이라니!’

‘그런 그렇고, 바로 옆 방에 아빠가 있는데 왜 이걸 나한테 허락받는 거야?’

다시 한번 웃는다.   


  



#2     


남편과 아이가 집에 없는 토요일 아침, ‘세속적’의 반대말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답적’이라고 알려 준다.      


고답적: 속세에 초연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내 음식은, 그리고 내 양육은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세속적’이라는 단어가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웃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겨냥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잦았던 작년, 아이의 생활 리듬을 두고 마음을 끓였다. 그러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나 횟수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아이와 나는 충돌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마음속으로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망설임은, ‘주말이나 방학엔 나도 그렇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며 지내고 싶으니까’라는 생각으로 토닥토닥 덮어버렸다.     


정해진 시각에, 이왕이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다.     


이 한 문장을 버리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이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내가 얻은 것, 그런 것들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 나눌 때가 올까? 먼 훗날 언젠가 올 수도 있고,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이제야 느끼는 것들을 부모님께 굳이 말씀드리지 않는 것처럼, 나를 많이 닮은 이 아이도 깨닫게 되더라도 입에 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내 눈빛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두 분이 아시는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서 그런 눈빛을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3


그 이후로 나는 휴일 아침이면 종종 김밥을 싼다. 밥 먹으라고 깨우는 것에 지쳐서 시작된 고육지책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 식사를 준비하는 호젓함도 좋고, 나름의 순서대로 재료를 준비해서 세팅해 놓고 ‘자 이제 말아볼까’ 할 때 내가 느끼곤 하는 좀 어이없는(주부가 된 것 같은) 성취감도 좋고, ‘이번엔 재료들이 가운데 딱 오게, 단단하게 말 수 있을까’하며 여전히 긴장해서 도전하는 마지막 과정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김밥을 싸 두면 ‘각자 알아서 먹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밥을 싸 둔 토요일 아침이면 나는, 부담 없이 산책을 나서거나 내 방에 틀어박힌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감각 중에 ‘도마질 소리’가 있다. 어느 여름 아침이었던 것 같다. 밤새 조금 덥게 잤는지 내 몸엔 땀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창문을 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할머니는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올려 주셨고, 부엌에서는 엄마의 도마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닿던 까슬한 감촉, 잠결에 들려오던 그 규칙적인 소리에 담겨 있던 속도감과 리듬감, 그것이 주던 뭐라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기억한다.


그때의 엄마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내 손은 그런 도마질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어설픈 내 손길에 ‘엄마의 마음’이 들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이 들어 있으니 내 음식은 종교적인 음식이 된 거라며 혼자 키득거린다. 큰아이가 좋아하는 청양 고추지 김밥,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 김밥, 우리 모두 좋아하는 치즈김밥을 싸서 유리 용기에 차곡차곡 담는다. 토요일 아침이다.

작가의 이전글 3. 가운데 마음이 돌돌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