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떼기3_ 아빠 이야기
“아빠 일기장, 나중에 언니한테 주신다셨어.”
집에 다녀온 여동생이 아빠와 한잔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한다. 동생의 살가운 성격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빠의 이야기를 많이 끄집어내곤 한다. 동생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앞세워 슬몃 아는 체를 해도 아빠는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화제를 바꾸신다.
아빠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기를 쓰고 계신다. 주로 해가 지난 다이어리에 쓰시는 것 같아서 한동안 연말이면 새 다이어리와 잘 나오는 펜을 선물해 드렸는데, 어느 해인가 이제 그만 사 오라고 하셨다. 평생 쓸 만큼의 다이어리와 볼펜이 쌓여 있다시면서. 약주를 아주 많이 드신 다음 날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일기를 쓰신다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언젠가 한 번 졸라서 아빠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주로 사건 위주의 메모에 가까웠는데 거기에는 입출금 내역도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주거나 받으셨던 액수와 이유까지 세세히 적혀 있었다. 어쩌면 펼쳐 보여주지 않은 페이지에는 아빠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록을 즐기고 중히 여기셨다. 나에게는 태어나서부터의 사진이 잘 정리되어 있는 앨범이 있다. 사진 아래나 옆에 날짜와 생후 몇일인지를 적은 종이가 단정하게 붙어 있어 있는 접착식 앨범이다. 카메라도 귀하고 필름도 아껴야 했던 그 시절, 아빠는 아마 여러 날에 거쳐 사진을 찍은 후 인화하러 가셨을 것이다. 한 필름 속에 든 서로 다른 날짜의 사진들을 기억하기 위해 날짜를 따로 기록하고, 동생과 내가 태어난 날수를 일일이 헤아리셨을 것이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아빠를 떠올리는 일은, 날이 갈수록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얼마 전에 ‘5년 일기장’을 샀다. 꽃무늬 자수가 고운, 자그마한 일기장이다. 아빠처럼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머리가 맑을 때 어제를 돌아보며 적는다. 기억력이 자꾸 쇠퇴하여 어제 일인지 엊그제 일인지, 한 일인지 하려던 일인지 헷갈리는 나를 위하여 구입한 것인데, 두어 달 남짓 적다 보니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저 사건만 기록했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규칙과 변화가, 나를, 나에게로 이끈다. 다이어리 속에 박제된 일상이 꿈틀거리며 나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낸다. 인상적인 사건이나 생각을 중심으로 적는 일기와는 또 다른 맛과 효능이 있다. ‘왜 진작 아빠를 따라 이렇게 써볼 생각을 못했을까’라며 아쉬워하다가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미 주신 것, 지금도 주고 계신 것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을, 얼마나 놓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아니, 사초도 아니고... 왜 유산으로 주신다는 거야? 지금 읽어야 반성도 하고 감동해서 자식들이 더 잘할 텐데.”
동생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아빠 일기장의 상속자가 되어서 기쁘다. 그러나 그 기쁨의 소는 슬픔이다. 먼 훗날 그 일기장을 넘기며 때늦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해질 마음이 이미 잡힐 듯 느껴져서. 다음에 친정에 가면 한 권이라도 미리 받고 싶다고, 그러니까 상속 말고 증여해 달라고 졸라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