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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 윤집궐중 Nov 10. 2021

15. 느린 물살, 작은 물결

눈발떼기4_ 할아버지와 눈발떼기


# 2021. 10. 1. 저녁     


‘사전을 찾아볼까? 설마 있겠어? 눈밝떼기? 눈발떼기?’

한의원 대기실에 앉아 사전을 검색한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나를 ‘눈발떼기’라고 부르셨다고 한다. 돌 무렵의 에피소드와 함께 전해 들은 이 별명의 의미는 ‘눈이 밝아서’라고 했다. 낮에 무슨 생각을 하던 끝에 이 별명이 떠올라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세상에, 이 나이가 되어서야 찾아볼 생각을 하다니!) ‘송사리의 강원도 방언’이라고 나왔다.      


‘송사리? 그 조그맣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 물고기? 지금의 나랑 전혀 안 어울리는 이미지인걸?’     

이번엔 송사리를 검색어로 넣어 본다.    

 

눈이 크고 입이 작다.

물살이 빠른 곳에서 살지 않는다.

수면의 표층에서 무리 지어 다닌다.

권력이 없는 약자나 하찮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 

느낌이 온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늘 재미있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수시로 주위 사람들과 일을 도모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말하는 동안 에너지가 충전된다.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 맞는 사람과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 떠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브런치 하자고 만나 장소를 바꿔 가며 10시간을 내리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그날 저녁 우리 세 명은 단톡방 이름을 ‘열시간’으로 정했다. ‘10, open, 뜨거운’의 의미를 담아. 숫자, 영어, 한자로 ‘열’에 의미를 부여하며 또 한참을 깔깔거렸다. 이게 나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내가 무척 활발하고 친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늘 뭔가를 하고 있긴 하지만 몸놀림은 느린 편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만의 동굴에서 곰곰 뒹굴뒹굴’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방화벽이 슉- 쳐진다’고 서운함을 담아 놀리곤 했다(물론 이 말을 들은지 한참 되었다. 사춘기 녀석들은 이제 엄마의 방화벽이 고마운 것 같다). 일정량의 동굴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상상 이상으로 뾰족해지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숨어들 곳을 찾는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싫어, 명절날 북적이는 분위기가 좋아, 너무 많은 일거리가 쌓여서 힘들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재미있어, 사람들이 호응하며 함께 하겠다고 달려들면 너무 좋아, 으쌰 으쌰 해야 살맛이 나, 말하기 싫어, 혼자 있고 싶어, 왜 또 일을 벌였을까, 얽매이기 싫은데...’ 

내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서로 상반되는 생각과 느낌이 밀려오는데 그게 모두 내 진심이라서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그러다 나 자신을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끈기 없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규정짓기도 했다.  



         



# 2021. 10. 8. 새벽     


눈발떼기 비밀을 알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수(數)나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였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수나 양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다가오는 속도’였다. 수시로 동굴에 들어가야 했던 이유 또한 속도 조절의 시간, 빠른 흐름 속에서 놓친 것들을 되짚어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빠른 물살에 휘말리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으니까.      


눈이 밝고

물살이 빠른 곳에서 살지 않으며

수면의 표층에서 무리 지어 다닌다.     


‘어머, 내 정체성을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알아차리셨던 거야?’

웃음이 난다. 오늘부터 나는 마음 놓고 눈발떼기가 되기로 한다. 


“할아버지, 보고 계셔요? 그 별명을 붙여주시던 날, ‘조거, 조거 저 성질머리 좀 봐라’ 하셨다던 할아버지, 한의원에 다니며 침 맞을 만큼 늙은 저 말이에요. 기억나지 않는 할아버지, 당신께서 불러주셨던 별명이 오늘 제게 닿았어요. 제 오랜 질문에 대답해 주었어요.”          





# 2021. 11. 8. 아침     


체육 수업이 있어 체육관에 내려갔다. P선생님 반도 체육 시간이다.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데 반색하며 인사를 받는다. 마침 잘 만났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꺼낸다.


“선생님, 선생님, 있잖아요~”

무슨 말이 이어질까 한껏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 감옥에 가게 된 거예요?”


다음 시간이 사회(역사) 시간이라고 한다. 교과서의 한 줄, 지도서의 몇 줄이 P선생님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 모양이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체육관에 선 채로 임진왜란을, 조선의 건국이념을, 정도전과 이방원을, 붕당 정치를 이야기한다. 각자의 체육 수업이 있어 더 길게 이야기 나누지 못하고 돌아섰지만, 오후 내내 P선생님의 물결이 마음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 2021. 11. 10. 새벽     


‘제 그릇은 딱 교실 한 칸 크기예요.’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곤란한 상황이면 하곤 했던 말이다. 상황을 부드럽게 넘어가기 위해 농담 삼아하곤 했지만 이 말은 나의 오랜 진심이다. 한 시간의 수업,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동료 몇 명이면 족하다. 

언제 어디서든 장황한 서두 없이 바로 수업 이야기로 진입 가능한 동료 몇 명, 그들과 무리 지어 쉴 새 없이 일으키는 작은 물결을 사랑한다. school(학교)의 어원은 라틴어 schola(스콜라)를 거쳐 고대 희랍어 σχολή(스콜레, 여가)에 닿아 있다. 학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물살을 가진 곳이다. 그 느린 물살 속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동료들과 무리 지어 쉴 새 없이 물결을 일으키며 살고 있다. 눈발떼기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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