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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 윤집궐중 Nov 14. 2021

16. 라만차의 기사: 허무와 꿈

산수유2_소설『돈 키호테』_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 1:2)     
슬픈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Tell me not, in mournful murmur.
Life is but empty dream.

롱펠로우 「인생 예찬」 중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는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돈 키호테』의 첫 장,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재치 넘치는 라만차의 시골 귀족은 이와 같이 임종을 맞이했는데, 씨데 아메떼는 뚜렷하게 그 마을을 명시하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는다.      


시골 귀족 알론소 끼하나가 살았던 ‘라만차’는 어디인가? 세르반테스는 왜 그곳의 지명을 알리려 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 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과 허구의 합류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알론소 끼하나를 'poor hidalgo'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페인의 귀족 신분 중 하나인 'hidalgo'는 작위가 없는 하급 귀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부자의 아들(Son of wealth)'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알론소 끼하나를 소개하는 데 ‘가난’과 ‘부자’라는 서로 모순된 의미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돈 키호테』는, 많은 양서(良書)들이 그러하듯, 사실의 세계에 속한 언어만으로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소설이다. 상징과 비유의 언어로 다가설 때, 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모험담은 우리 앞에 놀라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알론소 끼하나의 나이는 오십 정도 되었으며 얼굴과 몸은 말랐으나 뼈대는 튼튼하고 꼿꼿했다. 그는 꼭두새벽에 일어났으며 사냥을 즐겼고, ‘끼하나(착한 사람)’로 불렸다. 그에게는 마흔 살이 조금 넘은 가정부와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조카딸, 그리고 젊은 하인이 있었다. 그는 틈이 날마다 기사도 책을 읽는 데 골몰했으며, 그럴 때면 사냥이나 재산관리조차 잊고 살았다.


그는 창꽂이에 꽂혀 있는 창과 낡아빠진 방패, 야윈 말, 날렵한 사냥개 정도를 소유한 시골 귀족으로서 수입의 3/4을 식비로 지출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모두 축제 때 입을 옷을 사는 데 소비했다. 귀족으로서 지나치게 소박하다 싶을 정도의 음식을 먹는데도 오늘날 용어로 엥겔계수가 이토록 높다는 것은, 그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형편의 그가, 넉넉지 않은 수입의 대부분을 식비로 충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나머지 돈을 모두 ‘옷’을 사는 데 사용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알론소 끼하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한가한 시간은 기사도 책을 읽는 데 오롯이 바치고, 얼마 되지 않는 여윳돈은 ‘축제 때 입을 옷’을 사는 데 지출한다는 것은, 그의 삶의 구심점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론소 끼하나의 사람됨과 살아가는 이야기는, 동양의 나라들에서 칭송받던 삶의 방식, 군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닮아있다. 안빈낙도는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도를 즐기는 태도이다. 이것은 물질적 풍요를 배척하거나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덕(德)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다.      





기사도 책을 읽을 때면 만사를 잊어버리던 그는, 급기야 기사도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계 수단인 논밭까지 팔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구절들을 해석하기 위해 밤을 지새웠으며, 소설 속의 이야기를 읽고 참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괴로워하였고, 그 자신이 직접 기사도 소설의 결말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책만 읽던 그는 책에서 읽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방랑 기사가 되어서 스스로 실천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는 모험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비행을 바로잡고, 수많은 시험과 궁지에 몸을 던져 그것들을 멋지게 극복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에게 그것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동시에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밤낮없이 기사 소설을 읽는 동안 그의 마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기사 소설을 읽는다고 하여 누구나 방랑 기사가 되기를 꿈꾸거나 심지어 길을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아니다. 끼하나와 마찬가지로 기사 소설을 읽던 마을의 신부와 이발사 니콜라스만 보더라도, 그들은 끼하나의 결단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실지로 이들은 돈키호테가 되어 떠난 끼하나를 다시 마을로 데려오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쓴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정 책이나 이론, 사상을 접했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중세 기사 소설에는 실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사들이 등장하고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다. 마을의 신부와 이발사 니콜라스는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돈키호테를 미친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끼하나는 그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경이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파생된 야릇한 희열에 쫓겨 자기의 꿈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신부와 이발사는 사실과 경험의 세계에 살고 있고, 돈키호테는 꿈을 간직한 허구의 세계에 살고 있다.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사실의 세계에 속한 언어로만 해석하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잡아끄는 힘,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그 힘의 정체는 매장될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비록 그 독서가 파적거리였거나 그저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어떤 책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그 속에는 나를 잡아끄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허무맹랑하거나 잔인하거나 외설적인 모습을 띨 수 있지만, 그것은 모두 나에게 도착한 초대장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끼하나는 중세 기사 소설 속에 ‘생의 갈망’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 정체를 보다 선명하게 대면하기 위하여 침식을 잊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설명할 수 없었지만 결코 눈 감을 수도 없었던 소망의 정체를 발견하였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감당하고, 무엇에 자신을 헌신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기사 소설에 그려진 허구의 삶을 누군가 실지로 살아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허구가 아니다. 그러나 허구로 통용되던 것이 사실의 세계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그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의 돈키호테도 이런 운명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은 꿈을 꾸는 자에게 존재하며, 그에게 꿈은 곧 그의 삶이다. 인생은 원래 꿈이다. 한갓 헛된 꿈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돈 키호테』는 중세의 기사도를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온 경향이 있다.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우나무노는 이 해석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세르반테스는 중세 기사 소설에 들어 있던 ‘정신’을 돈키호테를 통하여 되살려내고 있다. 돈 키호테의 영웅적 행위는, 중세 기사 소설에 붙어 있는 찌꺼기를 털어내고 기사도 정신의 정수를 행위로 확립한다. 중세 기사 소설은 상대적으로 조롱당하는 위치에 놓이지만, 이처럼 영광스러운 조롱도 조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와 달리, 소설 『돈 키호테』는 과거의 기사 소설까지 영광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 만약 『돈 키호테』를 허황된 모험담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중세 기사 소설은 더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흔히 암흑기라고 일컬어지는 중세가 얼마나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돈 키호테』를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혹시 누가 아는가? 비록 선뜻 따라나서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야릇한 희열에 쫓기게 될는지. 누군가 돈 키호테와 같은 방식으로, 돈 키호테처럼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는 방랑 기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꿈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은 끼하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낡은 갑옷을 손질하는 것이었다. 그는, 녹슬고 곰팡이가 슨 채 몇백 년 동안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몇 대나 지난 조상의 낡은 갑옷을 손질했다. 중세 기사에게 있어서 갑옷과 투구는 기사를 보호하는 도구이기 이전에, 기사를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장비로서 의미를 지녔다. 기사들은 갑옷과 투구를 착용함으로써 스스로 기사임을 의식하게 되고 기사다운 행동을 하게 된다. 기사답다는 것은 행위로 증명되며,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하여 그는 점점 더 진정한 기사로 성장한다.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는 순간 그 속의 인물이 누구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갑옷과 투구에 합당한, 기사다운 행위만이 요구될 뿐이다. 끼하나가 갑옷을 정성 들여 닦고 문지르다가 투구에 얼굴 가리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 차례에 걸쳐 튼튼한 얼굴 가리개를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말과 자신의 새 이름을 지었다. 장장 나흘이나 걸려 여윈 말 로신(일하는 말)에게 ‘로시난떼(빼어난 말)’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여드레 동안 연구한 끝에 자신의 새 이름을 ‘돈 키호테’로 정한다. 스페인어 ‘로시난떼’는 일하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닌 Rocin과 ‘시·공간적 이전’ 또는 ‘빼어난’을 의미하는 ante의 합성어로서 ‘이전에 일하던 말’ 또는 ‘빼어난 말’이라는 뜻이 된다. 로시난떼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짐이나 수레를 끄는 ‘일’을 하던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말이 된 것이다. 앞으로 돈 키호테를 태우고 다니는 일은 ‘일’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로시난떼의 이름을 짓는 데 걸린 4일이라는 시간은 성서의 구절과 관련지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성서에 의하면, 천지창조 4일째에 하느님이 해와 달을 만듦으로써 시간의 구분이 생겨났다. 그리고 십계명 가운데 제 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노동의 시간과 구분되는 다른 시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로시난떼의 작명에 걸린 나흘이라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하느님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소설적 장치로 해석될 수 있다.


끼하나의 새 이름, 돈 키호테의 의미는 어떠한가? 스페인어 돈 키호테(Don Quixote)는 ‘Sir Thighpiece(넓적다리경)'로 번역된다. ‘넓적다리’는 고기의 가장 좋은 부위로 여겨져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끼하나가 자신을 돈 키호테라고 명명한 것은 스스로 주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겠다는 그의 서원을 표명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주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넓적다리경을 태우고 다니는 일은 결코 이전에 하던 ‘일’과 같은 것일 수 없다. 돈 키호테의 말은 로시난떼라는 이름을 얻음으로써 일상 세계를 초월한 말, 모든 말 가운데 가장 빼어난 말이 된다.


로시난떼 작명에 걸린 나흘과 마찬가지로, 돈 키호테가 자신의 이름을 짓는 데 걸린 시간 8일 또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8일이라는 시간은 예수가 할례를 받고 ‘예수’라는 이름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과 일치한다.   



  



갑옷을 손질했고, 얼굴 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갖추었으며, 말의 이름도 지어 주었고, 자신의 이름까지 고쳤다. 이제 남은 일은 사랑을 바칠 귀부인을 찾는 것이었다. 사랑을 바칠 귀부인이 없는 방랑 기사는 잎사귀와 열매 없는 나무요, 영혼 없는 육체와도 같기 때문이다. 돈 키호테가 자신이 거둔 영광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은, 중세적 사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중세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대상(icon)이 존재했던 시대이다. 중세 교회는 일반 사람들의 신앙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추상적 개념(예수, 진리, 사랑 등)에 대응하는 구체물(조각상이나 벽화 등)을 만들어 기도의 대상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렇게 기도의 대상을 구체적인 대응물로 제시하는 것은 그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기도의 대상을 늘 자신의 생과 관련지어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돈키호테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마을 처녀 알돈사 로렌소는 ‘둘씨네아(Sweet gloria)’로 변모된다(정작 그 처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음악적이고 신비롭고 의미심장한 이름, ‘둘씨네아 델 또보소’는 이제 돈키호테의 ‘마음속 연인’이 되어 그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창세 1:5)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탈출 20:8~10)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루가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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