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첫순간 Jun 20. 2023

[또 다른 브라운관Ⅰ]-여우각시별

누군가에겐 특별한 평범한 삶


    개인적으로 대부분 작품의 첫인상은 배우에 의해 형성된다. 이 작품의 캐스팅이 발표된 후 굉장히 많은 기대를 했다. 두 주인공 모두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동시에 외모나 배우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이 서로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학작용도 좋을 것 같았다.


    남자주인공의 신체적 장애와 대응되는 것은 여자주인공의 미성숙한 내면 상태이고 내면의 성장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초반부 인물 묘사를 볼 때부터 마음이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반 이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부터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난다. 섬세하고 따뜻한 대사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수연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여름에게 정식으로 털어놓은 다음 날 회사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사랑해요. 밤새 생각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멋진 말들은 다 이수연 씨가 먼저 해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이 말은 내가 먼저 합니다. 사랑해요, 이수연 씨. 사랑한다고요, 사랑한다니까요.

난 장애인이에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알고 보면 나도 장애인이에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피해의식 쩔고 자의식도 부족하고 자기 연민과 세상에 대한 투정, 구차한 별명과 실속 없는 노력만 하는 관계불안증후군에 만성 열등감까지, 마음속에 장애가 너무너무 많은 사람이라고요. 이런 내가 정말 괜찮겠어요, 이수연 씨한테?

이런 나여도 괜찮다면요.


어떻게 보면 낯 뜨겁고 진부한 표현의 집합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건넨다면 진심으로 고마울 것 같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넘치지 않게 서로를 배려하고 이것이 행동과 대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 정이 가는 또 다른 이유는 설정이다. 이 이유는 작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매우 세심하게 잘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마음 편히 보지 못했던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 '우영우'를 비판하려는 의도라기보다 두 작품 모두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인데 '여우각시별'이 개인적으로 더 특별한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 한다.


'우영우' 뿐 아니라 '굿 닥터'와 같은 경우를 포함해 장애를 다룬 많은 작품은 정신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모습으로 연기의 기술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하지만 '여우각시별'의 경우 남자주인공은 지체장애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다.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비장애인이 아닌 미장애인이라고 표현한 글을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표현의 의미를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한 분야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많은 드라마에서 이러한 능력이 주인공의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그럴 때마다 일종의 영웅처럼 묘사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현실에서도 중증 장애인이 비상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어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나 뉴스 등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실존인물이지만 가상의 인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같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필자) 본인도 저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싶은 마음에 속상하고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여우각시별의 이수연이라는 인물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장애인이 아니다. 비범하다기보다 업무를 잘 처리하는 쪽에 가깝고 무언가를 잘 해내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눈에 띄기보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주변인물들이 천사 같다는 비현실성도 덜하다. '여우각시별'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지만 이런 특징을 부각하지 않은 설정이나 전개방식이 좋았다. 회사 직원들 중에는 수연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수연 본인이 조심스럽게 눈치 보고 신경 쓰며 의식하는 모습이 좀 더 두드러진다.


현실적이라는 특징은 인물들의 행동뿐 아니라 후반부에 겪는 어려움과 그것을 마주한 주인공의 마음을 표현한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염증수치가 높아져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수연을 여름이 설득하고 부탁하며 나누는 대화

무슨 일이에요?/사직서를 냈다고요? 왜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 돼요? 내가 이수연 씨 팔이 되어주고 다리가 되어줄게요.

(수연의 내레이션과 여름의 대사가 교차되어 들린다.)

'현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겹고 무거울 거야.'

나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게 해 줘요.

'그런 현실과 부딪히다 보면 넌 점점 지쳐갈 거고……'

이제 그 웨어러블은 벗고 치료받아요 제발, 네?

'널 거기까지 가게 하고 싶지 않아.'

(울먹이며) 나 혼자 남겨두지 말라고요. 이수연 씨 없이 내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냥 지나가게 해 줘, 여름아./안 돼요, 싫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렇게 하자, 우리.


    다가올 현실의 무게 때문에 여름이 지칠까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 수연이 어떤 마음일지 너무 이해가 됐고 무척이나 공감이 되었다. 장애 당사자와 주변인에게 일상은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좀 더 확장하면 장애인뿐 아니라 불치병에 걸렸거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인물에게도 적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좋은 대사라고 생각한다.  


    섬세한 대사와 설정 덕분에 전체적으로 좋게 본 작품이지만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결말이 정리가 되지 않고 갑작스러운 느낌으로 끝이 났다. 이 문제의 원인은 제작진이나 배우들의 탓이 아니라 후반부에 스포츠 중계방송을 송출하게 됨에 따라 원래 20부작으로 기획되었던 드라마의 분량을 16부작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 화에 재회 후 포옹하는 장면에서 남자주인공의 얼굴이 나오지 않아 누군가 대역을 맡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배우의 얼굴과 표정을 보여줬다면 더 큰 여운이 남았을 것 같아 아쉬웠다.


    이제훈, 채수빈 배우는 이 작품으로 연말시상식에서 각각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했다. 시청률도 10퍼센트 가까이 나왔던 걸 보면 반응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이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글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여우각시별'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비경쟁 배우 부문]―박민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