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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닝뽀유 Dec 21. 2022

인사없던 아파트 엘베는 어떻게 사랑방이 되는가?

엘리베이터 인사에는 아파트 주민들만이 아는 나름의 코드가 있다. 인사 코드와 무신경 코드가 바로 그것이다. 새로 이사온 아파트는 그 전 아파트와 큰 차이가 있었다. 엘베 인사는 가장 전염성이 큰 일과 중 하나라는 걸, 이 아파트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1년 전 이사를 온 첫날 나는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인사를 꾸벅 꾸벅했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인사를 한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이제 나의 인사는 0으로 수렴되었다.


이사 6개월 후 우리집에 놀러온 동생이 대단한 발견을 한 듯 물었다. "누나 진짜 희한하다. 왜 이 아파트는 인사를 안하지? 나 오늘 인사 여러번 했는데 아무도 본척을 안해주더라. 엄청 뻘쭘했다" 동생의 말을 듣고는 인사없는 우리 아파트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 이후로 아파트의 인사 코드에 대해 나름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가설 1.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폰을 좀비처럼 보고 다니는 일상이 없었던 당시, 엘리베이터가 사랑방이던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으면 주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으로 흥미진진, 깨알정보, 우선순위의 일들이 많다. 엘리베이터에만 타면 깜빡 잊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엘베에 인터넷 신호가 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하지만 동생은 이 가설이 틀렸다고 말한다.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동네 강아지도 순간 순간이 분주할 정도니까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산골이나 서울 한복판이나 누구나 각자의 비즈니스가 있다.


가설 2. 무인사, 무반응이 전염되었다. 나처럼 처음에 이사온 사람들은 해맑게 인사를 건넨다. 적막을 깬 해맑음은 뻘쭘함과 무안함으로 싸늘하게 바뀐다. 이를 여러번 경험한 자들은 인사를 마음 속에서 지워간다. -> 동생은 인사를 안받아주는 건 그래도 괜찮은데, 이상한 듯 쳐다보는 시선이 상당히 낯설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오면서 90도 인사를 깍듯이 했다고 하니, 무인사가 문화로 자리잡은 우리 아파트 코드에서는 신기한 이방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만나는 누구나에게 인사를 한다는 동생네 아파트 이웃들도 무인사 코드의 아파트에 온다면 인사를 잃어갈 것이라 짐작된다. 인구 밀도가 높고,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한국에서는 도드라지거나 튀는 행동이 지양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엘리베이터 인사도 더 잘하거나, 더 하지 않는 쪽으로 영향을 받는다. 엘리베이터는 좁고 폐쇄된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적 특성이 있어서 문화간, 사람들의 특징을 파악하기에 좋은 장소다.


가설 3. 개인적 성향의 차이다. 인사를 잘하건 잘하지 않건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차이일 뿐 인사성에 있어서 지역간, 아파트간의 큰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타인을 잘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강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정말 자주 하고 서로 인사 잘 주고 받아" 하지만 낯선 남자가 인사를 걸어오면 불편할까봐 남자들에게만 인사를 한다고 한다. 개인적 성향에 이어, 젠더적 성향도 있다니 엘베 인사의 세계는 참으로 흥미롭다.


혼자 아침 저녁으로 엘리베이터를 오가면서 나름의 재미를 더하는 엘리베이터 연구, 어느덧 세 달째다. 최근 나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인사와 무인사의 패턴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 생긴거다.


아기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베 분위기는 한겨울 녹여주는 온실이 된다. 출근 시간 아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열리고 5~6명의 사람들이 탔다. 춥다고 동동 입혔더니 2살 아기는 7겹쯤 옷을 덧입은 곰돌이가 되었다. 털모자에 눈이 가려 뒤뚱뒤뚱 걷다가 콩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주민은 "아기가 있으니 분위기가 이렇게 변하네요" 했고, 다른 분은 "아기가 있으면 온 걱정이 사라지고 웃음만 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주셨다. 우리집 아기는 답답한게 싫어서인지 계속 신발, 양말을 벗어던져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그럴 때 아기 춥겠다면서 떨어진 양말을 주워서 도로 신겨주시기도 한다. 그리고는 덕담도 건네신다. "생각해보면 이 때가 참 좋았어. 엄마도 힘들어도 나중에 되면 그리워지니까 이 때를 즐겨!"




외국 로드트립 중 엄마가 해준 밥과 건조기에서 갓 나온 따뜻한 빨래가 그리울 때, 한국 국적기에 올라서면 눈물이 울컥 난 적이 꽤 있다. 아무도 없는 길을 몇 시간만 걸어도 공포가 찾아온다.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심지어 인사 한마디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된다. "적어도 이곳은 안전한 곳이구나. 사람살만한 곳이구나."

얼마 전 떠났던 스페인 여행, 우리 가족은 차로 스페인 한바퀴 수박 겉핡기를 했다. 어떨 땐 사람 한명의 흔적 없는 황무지가 몇시간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꽤 큰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난다. 집들과 가게들이 뭉텅이처럼 오밀조밀 모여있다. 마을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작건 크건 서로의 역할을 하며 함께 퍼즐조각처럼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하늘 위의 새들도, 개미들도, 작은 풀들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듯이 우린 마을이 필요하다.

스페인 발렌시아(좌)/해발 1236m 지대에 자리잡은 몬세라트수도원
스페인 그라나다

그래. 이웃들은 정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층간소음 때문에 서로 예민해졌긴 해도,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수백명의 가족들이 온기를 나누며 살아간다. 아파트 엘베에서 인사 없는 몇달을 보내며 이제는 익숙해졌다. 분위기 체인저 아기와 함께 엘베를 타면서 꾸벅꾸벅 인사를 하기도 하고, 웃음을 주고 받는다. 말은 안해도 마음 나누는 이웃이 있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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