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만났을 땐 그냥 ‘토니’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우리말, 그것도 존댓말로 편지를 쓰려니 저보다 5살은 많아 보였던 분께 이름만 부르기 애매하네요.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토니 아저씨, 잘 지내지요?
아저씨를 만났던 그때는 인도를 여행한 지 한 달 즈음된 시점이었어요. 여행 초반엔 해가 지고 난 후 절대 밖에 안 나갔지만, 여행 한 달 즈음되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서 안전한 지역에선 밤에도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었죠. 그날은 마침 화장지가 똑 떨어져서 화장지를 사러 나간 길이었어요. 그 당시 인도에선 배낭여행자들이 가방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하나씩 달고 다녔어요. 화장실에서도 쓰고, 여기저기 쓰임이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 모습이 좀 우습네요. 당시 저와 친구는 가방에 침낭 하나씩 달고, 화장지 달고, 1.5리터 페트병 물을 돌아가면서 들고 다녔어요. 500미리는 비싸고, 금방 다 먹으니까요.
여하튼 그날 밤엔 화장지를 사러 집 앞 가게에 갔어요. 화장지를 사고 있는데 익숙한 말이 들렸지요.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세요?” 하고 말이에요.
돌아보니 인도인의 얼굴을 한 바로 아저씨, 토니였지요. 깜짝 놀라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한국말을 할 줄 아시네요?” 묻자 아저씨는 한국에서 살다 왔다며 능숙한 한국어를 뽐냈어요.
그리고 한국인을 만나 너무 반갑다며 차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했지요.
그렇게 그 밤에! 우리는 짜이를 마시러 갔어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저씨는 인도가 아닌 방글라데시 사람이었지요. 방글라데시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며, 지금은 잠시 휴가를 왔다고, 곧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요. 한국에서 싱크대 설치하는 일을 한다며, 탤런트 누구의 집에 싱크대를 설치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했었지요. 아저씨는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듣는 저도 한국이 자랑스러워지더라고요.
그날 밤 헤어지기 아쉬워한 아저씨는 인도에서도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걸 아느냐며 저희에게 소고기를 사주고 싶다고 했지요. 너무 기분 좋게 제안하는 거라 거절하기도 뭐해서 우리는 다음 날 또 만나기로 했고요. 그래서 그다음 날 저희는 무려 인도에서 소고기를 맛보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지요.
소를 숭배하는 인도인들은 절대 소고기를 먹지 않는 줄 알았는데 버젓이 소고기 카레를 파는 식당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어요. 맛도 있었고요.
식사를 하면서 아저씨는 이번엔 차로 몇 시간 안 걸린다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지요. 그날 식사 후에 방글라데시 집으로 돌아간다고요. 우리가 놀러 가면 가족들이 엄청 좋아할 거라며 그렇게 초대를 해주셨지만 우리는 차마 거기까지 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거절하는 대신에 아저씨가 버스 타러 가는 곳까지 배웅을 나갔었지요. 그날 버스 앞에서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너무 웃겨요. 전 날 먹은 짜이 때문일까요? 얼굴이 어찌나 부었는지 특히 눈이 많이 부어서 제 모습이 제 모습 같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버스 타고 가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생각했었어요. '아저씨네 집에 놀러 갔으면 우리 여행은 지금보다 훨씬 다이내믹 해졌겠지. 우리의 여행이 좀 더 풍성해졌을 거야.'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계획에 없던 선택을 할 줄 모르는 소심쟁이들이었어요.
그런데 아저씨,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지금 한 번 구글 지도를 검색해봤거든요. 그때 우리가 만났던 콜카타에서 방글라데시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말이에요. 자그마치 10시간이네요!
게다가 우리는 30시간 기차를 탄 적도 있어요. 아저씨와 헤어진 후 인도 여행을 마치고 캘커타에서 뉴델리로 가는 기차를 탔거든요. 원래 기차 시간은 22시간 정도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는데 언제나 그렇듯 기차는 연착되었고, 느릿느릿 온 동네에 다 서면서 가더니 결국 기차 안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도 몇 시간을 더 갔지요.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내려서 무언가를 사 먹고 싶었지만, 우릴 두고 기차가 가버릴까 봐 내리지도 못하고 기차 안에서 파는 모든 음식을 다 먹어봤던 기억이 나네요.
맞아요.
그때의 우리에겐 10시간짜리 버스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이만큼 흐른 후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그때의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여행을 했을까요.
얼마 하지 않는 물을 500미리 사면 비싸다고 1.5리터 병을 들고 다니는 미련을 떨고, 국내선 비행기를 탔으면 좋았을 콜카타 - 뉴델리 구간을 30시간 기차를 타고. 게다가 뉴델리에서 처음 시작한 여행을 콜카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가야 했던 이유도 당시 제일 싼 비행기 표를 끊는 바람에 그랬던 거였죠. 출입국 도시가 다르면 가격이 더 비쌌거든요.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던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행의 방식.
비록 기차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무거운 물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그 여행은 이후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절대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추억들을 만들어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