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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풀잎 Jun 19. 2019

부드러운 잔디가 틈새를 비집고 자라났다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리뷰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화자인 변호사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오전에는 멀쩡하다가 오후에 폭발하는 터키, 술을 먹지 않아도 술 먹은 것처럼 오전에 폭력적이었다가 오후엔 얌전해지는 니퍼즈, 그리고 어른들의 생강빵과 사과를 사 나르는 진저 넛.

소개글을 통해 변호사가 이들을 맘에 들어 하진 않지만 자기 편의를 위해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책 제목이기도 한 인물, ’바틀비’에 대해 변호사가 받은 첫 인상에 대한 묘사는 독자인 나도 큰 기대를 하게 할 만큼 멋졌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
그가 바틀비였다.
p58           



 이 문장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엄청 멋진 바틀비가 일도 척척 잘하겠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틀비는 나의 속을 터지게 했다.

무조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상사와 동료들이 하는 명령 혹은 부탁을 거절하는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했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우유부단한 일처리도 답답하게 느껴지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독서후기들을 찾아보고 책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더 바틀비의 심정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바틀비를 보고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열심히 일했고, 성실히 일했지만 자꾸 업무량이 부당하게 많아졌고, 그래서 파업하자 돈을 주면서 나가라고 종용당한, 결국 해고를 당했으나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책모임의 선생님은 바틀비를 보면서 타인에게 싫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고, 또한 ‘그냥’ 안 하고 싶다고 말 하는 많은 아이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안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많구나.

아이들도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아이에게 왜 하기 싫은 이유를 말하라고 그렇게 다그쳤을까.      

 

마지막 부분에 바틀비의 전직이 배달불능 편지를 처분하는 사람이었다는 설명에서 서글픔이 몰려온다.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으로 묘사되는 바틀비에게 배달불능 편지의 소각은 더욱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 배달불능 편지의 절망이 이제 이 책의 화자인 변호사에게로 왔다.

그는 이제 바틀비를 돕고 싶어도 (물질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했기 때문에 말이다.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월가에서 벽 바로 옆, 빛도 잘 들지 않는, 그 와중에 칸막이로 구분된 그 좁은 자리에서 그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던 바틀비.

그의 죽음 역시 주변 소음을 집어 삼킬 정도로 두꺼운 벽들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허먼 멜빌은

빽빽한 빌딩 숲 그 안에 또 벽, 벽, 벽.

그 벽들 사이에 자그마하게 존재하는 ‘사람’의 말에,

그 ‘사람’의 마음에 귀기울여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변호사가 바틀비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에 본 ‘자그마한 잔디’에 대한 묘사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발아래에 부드러운 잔디가 틈새를 비집고 자라났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피라미드 속에서 새들이 쪼개진 틈새에 떨어뜨린 잔디씨앗이 어떤 이상한 마법에 의해 싹이 튼 것 같았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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