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한국의 겨울이 너무나도 추운 애엄마의 선택은

by 첫둘셋

지난겨울, 그러니까 2024년 겨울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나 하게 된다. 내년 겨울은 어떻게 해서든 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야지. 다시는 이 추운 겨울을 한국에서 보내지 않으리라.


뭐가 그리 지긋지긋한지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첫 번째로 나는 지독한 계절성 우울증을 수년째 앓고 있는 인간이다. 해가 바뀌었으니 햇수로는 벌써 6년째 정신과에 다니며 공황장애 치료를 받고 있는데, 매년 나의 패턴을 체크해 주시는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진단해 주신 내용이니 패션 우울증 아니고 전문가의 소견되시겠다.

"매년 가을쯤 되면 힘들어하시네요?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데,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으시는 편인 것 같군요."

"오, 맞아요. 봄에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을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햇빛을 많이 보고 꾸준한 운동을.. 알아서 잘하시겠으니까 약 잘 드세요."

"넹."


사실 계절성 우울증 진단을 받고서는 기분이 조금 좋았는데, 나에 대한 수수께끼 하나를 푼 기분이랄까? 이유인즉슨 20대 때 늘 연애의 시작이 가을이었는데, 나조차도 왜 9월만 되면 없던 남자친구가 생기는지 궁금했었다. 8월까지는 '남자 없이 잘 살아~'를 흥얼거리다가도 귀신같이 9월이 되면 남자친구가 생겼고, 스무 살 이후로는 혼자서 연말을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에 아주 미쳐있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이 모든 것이 다 계절성 우울증 때문이라면 말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 이것은 나의 오래된 병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공황장애와 산후우울증에 가려져 남들보다 조금 더 가을을 타는 정도의 느낌으로 가던 요 계절성 우울증이 공황이 잠잠해지고 산후우울증이 가시니 제1의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3년쯤 전부터는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면 무력감과 우울함이 온몸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직 맞닥뜨려본 적은 없지만 이게 '빈 둥지증후군'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 년간 열심히 키운 우리 반 학생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사실 늘 하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왔고, 내 직업에 대한 보람이나 자긍심 또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만들어 놓은 모래성이 밀려오는 파도에 의해 한 순간에 부서지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을 느꼈다.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그렇게까지 마음을 쏟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이직도 알아보았지만, 끝난 뒤의 공허함만 빼면 나는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공허함 때문에 사랑하는 전부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뒤로 11월이 되면 안 쓰던 일기를 쓰기 시작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일기에는 대부분 이런 말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미 지쳤다. 이 삶은 나에게 너무 버겁다. 열심히 헤엄칠수록 점점 더 빠져들어가는 기분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 무겁다.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니 너무나도 끔찍하고 행복한 삶이다. 더 이상 빠질 힘도 없고 괴로울 힘도 없다. 내가 건너야 하는 호수는 사실은 심해가 아닐까. 눈을 감으면 하루가 끝나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한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한 달? 일주일? 하루? 매 시간과 매 분, 매 초? 뭐 이런. 누가 봐도 우울증 환자의 일기.


그러다 작년 겨울, 두 달간의 겨울방학을 인간 이하의 모습으로 끔찍하게 살아가며, 어떠한 희망과 의지와 계획과 기력도 없이, 그저 최소한의 욕구만 겨우겨우 채워가며 살아가다가 드디어 다짐했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겨울을, 다시는 이곳에서 보내지 않으리라. 나는 따뜻한 남쪽나라로 갈 것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겨울 나는 이야기,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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