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너로 결정했다!

나와라, 파이릿!

by 첫둘셋

하루에도 열두 번씩 중얼거렸다. 오빠, 나는 안 되겠어. 나는 남쪽나라로 갈 거야. 그래. 가야겠다. 남쪽나라에 가면 괜찮아지는지 한번 해보자. 정말로 계절이 바뀌면 우울함이 사라지는지 한번 해보자. 얼마나 있어야 괜찮을까. 짧은 여행은 싫어. 여행은 어차피 비일상이잖아. 난 비일상에서는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야. 나는 괜찮은 일상을 보내고 싶어. 겨울방학이라는 기간을 일상적으로 괜찮게 보내고 싶어.


겨울이 되면 나의 생활반경은 극도로 축소된다. 안방 콘센트 옆 이부자리. 침대에 올라가지도 않는다. 침대에는 온기가 없거든. 퇴근하면 바로 손발을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불 밑 보일러의 따뜻함을 느끼며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퇴근할 일이 없는 겨울방학인데, 그때 역시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럴 거면 원룸에 살걸 그랬어.

겨울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집이 이렇게 넓은데, 너는 이 방에서 벗어나질 않네.

그러게 나도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

이 이불 밑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태양을 사랑한다. 햇빛을 쬐고 있으면 광합성을 하는 초록빛 식물이라도 된 듯한 생기가 느껴진다. 이 문장을 쓰고 잠시 고민을 했는데, 식물이 된듯한 생기라는 것이 말이 되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푸르름이 낫겠다. 내 안에 생기가 가득 차고, 싱그러운 푸르름이, 아니 이건 너무 광고 문구 같다. 그치만 나는 얼마나 태양을 사랑하냐면! 나는 아무리 햇빛이 뜨거워도 모자를 쓰지 않는다! 짱구 이마를 가지고 있어 남들보다 이마가 훨씬 뜨거워지지만, 나는 그 따땃해진 이마마저도 사랑한다. 초록빛 식물들이 아무리 뜨거워도 잎을 벌려 햇빛을 온전히 받아내듯, 나 또한-선크림은 바르지만-얼굴에 그늘 하나 드리우지 않고 햇빛을 맞이하는 사람이다 이거다.


이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우리 아들들의 이름에도 태양을 숨겨두었다. 첫째의 이름에 들어간 '솔'은 스페인어로 태양이고, 둘째의 이름에 들어간 '선'은 영어로 태양이다. 둘의 이름 뜻도 사실은 커다란 태양이다. 하지만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두 아들은 전생의 원수마냥 태양자리를 두고 싸움을 계속해대는데... 는 장난이고 실제로 그렇다. Sol과 Sun, 둘 다 내가 사랑하는 태양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태양을 누리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남편의 방학이 1월 말이다. 그럼 어떡해?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애 둘 데리고 간다. 애 둘을 데리고 가는데 일상을 살아야 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어학원으로 가자!라는 의식의 흐름으로 필리핀 4주 어학연수를 등록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 영어 학원도 다녀보지 않은 아들 둘이, 간신히 알파벳송만 익히고 냅다 필리핀으로 오게 된 이유 되시겠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한 달간 살다 오겠다. 그치만 남편은 못 가고 나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나는 최대한 여유 있는 나의 일상을 살고 싶다. 아들들도 따뜻한 나라를 충분히 즐기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목표였는데, 쓰면서도 웃기다. 목표 어디에도 '영어공부'는 없네. 나의 우선순위는 안전, 수영, 축구, 곤충채집이었다. 안전한 공간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그 안전한 공간에서 수영, 축구, 곤충채집이 가능했으면 했다. 요즘 트렌드는 호텔을 한두 층 빌려서 숙박을 하고, 호텔의 수영장과 조식 및 부대시설 등을 이용하며, 근처의 어학원 건물로 이동해서 수업을 듣는 형태인 것 같았는데, 아들 둘 엄마에게 이 형태는 매우 번거로웠다. 일단 호텔에 투숙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투숙객들에게 언제든 민폐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형견의 활동량에 맞먹는 우리 큰 아들에게 호텔이라는 공간은 너무 우아하고 고상한 인간의 영역이다. 나는 필리핀의 세부에서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캠퍼스를 지닌 어학원을 발견했다. 호텔에 비하면 시설이 낡고-스콜이 오면 방이 물에 잠긴다-, 밥이 맛이 없고-삼시 세 끼가 기대가 안됨-, 편의시설이 없지만-가장 가까운 세븐일레븐이 걸어서 10분-, 캠퍼스가 넓고, 푸르고, 야생미가 넘쳤다. 딱 보니 우리 아들이 좋아할 것 같다. 아들 엄마는 이런 식으로 사고하고 결정한다. 사실 별로 알아보지도 않았으니, 혹시 진짜로 어학연수를 갈 생각이 있는 사람은 나에게 정보를 묻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는 결제에 있어서 비교 따위는 없는 여자다. 필요와 예산이 맞으면 다른 데는 알아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유학 중개업체도 딱 한 군데만 연락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목표는 나의 일상 회복, 아들들의 행복한 방학(수영, 축구, 곤충채집을 포함한)이다.


무튼 이렇게 얼렁뚱땅, 하지만 내 인생의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얼렁 뚱땅이니 신기할 것도 없이, 나의 겨울방학 필리핀 세부 한 달 살기, 그러니까 어학연수를 곁들인, 뭐 그런 게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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