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가만 보면 진짜 용감해. 내가 애 키울 때는 애들 데리고 어디 나갈 생각도 못했는데."
나를 두고 '용감하다'라니.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의 이유들로,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결정된 사항일 뿐인데 용감하다뇨?
그리고 나는 이 짓이 왜 용감한 짓인지, 나의 알고리즘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출발도 전에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은 모두 내가 겪은 100% 실화이며, 잔혹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일요일 밤 9시 세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후 1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지방에 사는 사람의 설움이 바로 이것인데 수도권 주민들보다 반나절 일찍 여행이 시작되고, 반나절 늦게 끝난다. 쨋든 위탁수하물로 부쳐질 캐리어 2개와 기내용 캐리어 1개, 생일선물로 받은 쨍한 컬러의 힙색을 단디 챙기고, 제일 중요한 아들 두 놈을 챙겨서 2시에 인천공항 리무진에 탑승했다. 중간에 휴게실을 한번 들러 아이들 간식을 대충 사 먹이고 인천공항 1 터미널에 도착하니 5시. 생각보다 아이들은 조용하고 씩씩하게 인천공항까지 와주었...는데 첫째야, 너 왜 열이 나냐?
발갛게 달아오른 우리 핫소스(어학원에 와서 친구들이 핫소스라고 부르고 있다.)는 노란색 패딩을 턱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푹 뒤집어쓴 채 쌕쌕 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열나? 아까 휴게소까지 멀쩡했잖아? 이번 겨울에 한 번도 안 아프더니 왜 하필 지금! 우리를 배웅 나와 준 동생네 가족 덕분에 정신을 좀 차리고-누나, 애들은 차 속에서 뭐 먹으면 체해서 열나기도 해, 해열제부터 먹이자. 언니, 일단 짐부터 부치고 오자, 언니는 핫소스 보고 있어 내가 떤떤이(둘째) 데리고 저녁 먹고 올게, 지하 1층에 병원 있는데 가볼래?-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 1층 병원으로 갔다.
우리 핫소스 덕분에 인천공항에도 병원이 있다는 걸 알았네? 저녁 7시 반까지 진료 보니까 이런 꿀팁은 모두들 기억해 두자. 진짜 혹시 하며 기다리는데 해열제 덕분인지 핫소스는 점점 기력을 차리고 일어난다. 아유, 그냥 멀미했나 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의사 선생님도 "이 나이 때 애들은 뜀박질만 해도 열이 오르곤 하죠, 허허."라며 혹시 모르니 독감 검사는 하고 출국하자 하셨고, 우리 핫소스는 설마설마했지만 너무나도 당연하게 A형 독감 판정을 받게 된다. 잠깐만, 얘가 독감이면 경험상 100%의 확률로 떤떤이도, 나도 곧 독감인 건데? 선생님, 제가 지금 출국이라 나가면 타미플루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독감 약을 2배로 처방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당연히 안됩니다. 알겠습니다.
진료가 끝나고 약을 처방받고 나오니, 이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더 고민할 시간도 없이 이륙 1시간 전. 그냥 지금부터 열심히 뛰어가며 애들 챙겨가며 수속 밟아야 겨우 탑승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다. 야, 나 어떡하냐? 안 가는 게 맞냐? 몰라, 일단 비행기 타고 생각해. 그래서 탑승. 공항이 혼잡해서 뭐 이런저런 이유로 40분 정도의 지연이 있었는데, 핫소스는 춥다며 패딩에 푹 파묻힌 데에 더해서 담요 2개를 더 덮고 잠이 들었다. 그래, 일단 빨리 세부에 도착하자. 지금은 그게 최선이다.
그래서 별 일 없이 도착했냐고? 뭐, 별일이랄거는 기내식 시간 돼서 자고 있는 핫소스 깨웠는데 주스 한 모금 먹더니 토를 해서 내가 일단 손으로 토를 받았지. 옆 자리의 친절한 아가씨가 봉투 열어줘서 무사히 이관시키고 핫소스 다시 재웠지. 떤떤이는 귀가 아프다고 조금 울긴 했는데 사탕 주니까 조용해졌고, 어찌어찌 세부 도착. 픽업 나온 차 타고 어학원 갔더니 새벽 3시네? 핫소스는 계속 열 나는 중이고 나는 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 월요일은 전체 오리엔테이션이었는데, 못 들었지. 오후에는 단체로 SM mall 가서 환전도 하고 쇼핑도 했댔는데, 못 갔지. 그냥 하루 종일 핫소스 옆에서 열 재고-이 와중에 40도를 두 번이나 찍은 우리 아들!-약 먹이고, 같이 좀 자다 약 먹이고. 그렇지만 우리 핫소스 애기 때부터 별명이 강철병아리였거든. 딱 24시간 40도에 가까운 열이 4번 정도 오르고 난 뒤로 우리 핫소스는 완쾌! 휴, 다행이다, 싶은 순간을 진짜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