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 잔혹사 전개

나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by 첫둘셋

한나절 정도 즐거웠나 보다. 더 이상 열이 오르지 않고 푹 잠이 든 핫소스를 바라보며, 십여 년 만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원어민 수업을 들으며,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들들과 야외 수영장에서 따스한 밤공기를 느끼며. 아, 역시 따뜻한 나라에 오길 잘했어.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저녁에는 수영하고, 이 얼마나 보람차고 풍요로운 삶이란 말인가! 한껏 여유롭고 행복한 한나절을 보내고, 나의 이 몽글몽글함을 나누고자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리고 노트북을 덮자마자, 젠장, 우리 깅깅이 열 난다. 깅깅이는 둘째인데 앞으로 떤떤이, 말랑이, 포동이, 쫀득이 등등으로 불릴 것이다. 다들 막내들은 이름 18개씩 있는 거 맞으니까.


깅깅이의 열은 핫소스와는 다르다. 핫소스는 우리 집 대표 강철병아리로 아무리 열이 나도 낮시간엔 견뎌내는 습성, 죽어도 학교에서 죽는다는 마인드, 기본적으로 지지 않겠다는 투지를 지니고 있어 크게 아파 본 적이 없다. 그게 독감이든, 코로나든, 뭐든 간에 핫소스는 길면 이틀 잠시 앓다 다시 일어난다. 것도 매우 씩씩하게. 어젯밤까지 열나던 애가 갑자기 오늘 아침에 아이스링크장 가야 되니까 학교 다녀올게요 하는 타입이랄까. 반면 우리 깅깅이는 유약함의 아이콘, 어미 애간장 달여 국 끓여 먹는 친구, 프로폐렴입원러로 학교 앞에서 팔던 100원짜리 병아리처럼 자칫하면 시들시들 앓다 죽게 생겨서 결국 3차 병원 대리석 깔아주고 나와야 하는, 태생부터 다른 아이이다.


깅깅이는 걸걸한 쇳소리를 내며 기침을 토해냈고, 뜨끈하고 벌게진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이제 막 희망의 불씨를 보았기 때문일까? 긴장을 풀자마자 다시 시작될 고난에 화가 나서였을까? 이때부터 급격하게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머릿속이 뒤엉켜서 스스로 넘버링을 해가며 생각을 해야 할 정도였다.

1. 깅깅이는 열만 나고 끝나는 경우는 잘 없다.

2. 깅깅이는 단순 감기이든 독감이든 간에 빠르게 병원에 가지 않으면 폐렴으로 번질 위험이 많다.

3. 눈을 뜨자마자 병원에 데려가서 진료를 받아야지.


눈을 떴다. 데스크에 가서 병원을 안내받았다. 한국 간호사가 일하는 제휴병원을 소개받았다. 카톡으로 연락한 결과 오늘은 휴무이니 내일 예약하라고 했다. 내일 오전 11시에 예약했다. 가는 차편 또한 예약해야 한다고 했다. 차편이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물었더니 9시에 출발이라고 했다. 무슨 병원이 2시간 걸리냐 물어보니 트래픽잼 때문에 늦어도 1시간 반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깅깅이는 열이 나는 상황에서 1시간 반이나 차를 타줄 만큼 얌전한 친구가 아니다. 적어도 내 뺨을 500대는 때릴 것이고, 가는 길 오는 길 울다 지쳐 목이 쉬어 폐렴이 진행될 정도의 병아리다.


간단히 적었지만 3시간 정도 고민하고 오전 내내 아이를 지켜보다 내린 결정이고, 일단 뭔지 모르니 해열제 먹이며 관리해야지라고 생각한 순간 깅깅이의 열이 39.7도를 찍었다. 해열제를 먹였다. 열이 내리지 않았다. 교차복용을 준비했다. 아뿔싸 아세트아미노펜이 떨어졌다. 지켜보았다. 39.7에서 아무리 물수건으로 아이를 닦아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당장 병원에 가서 아세트아미노펜이라도 얻어와야 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을 검색했다. 데스크에 가서 여길 갈 테니 차를 불러달라고 했다. 데스크에서는 여기보다 조금 더 큰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이미 시간이 오후 6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주하는 필리핀 간호사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깅깅이와 나는 아무래도 어학원에 제휴업체인 것 같은 기사님이 모는 승합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면서 한 생각은 딱 두 가지다. 내가 필리핀까지 와서 병원을 가다니. 그리고 아, 이거 까딱하면 가다 죽겠는데? 나는 보통 운전을 할 때 앞 차 번호판을 크게 읽으며 온갖 쌍욕을 하지만, 클락션을 누르거나 하이빔을 쏘는 무례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나의 공간에서, 나만 들을 수 있는 욕지거리를 해대지만, 상대방에게 이러한 상실감을 표현하거나 티 낸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 필리핀 기사님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하나도 안 급한 눈빛으로 중침을 하며 삐비ㅣ비삐ㅣ이ㅣ삐이ㅣㅇ이 삐삐삐삐비ㅣ삐삐비ㅣ 딸깍딸깍(하이빔) 삐비ㅣ이 삐삐삐비ㅣ삐삐ㅣㅣ비비비비비ㅃ을 남발하는 것이다. 차선 4개에 지프니 3대와 승합차 1대 그리고 오토바이 2대가 지나가는데 이게 맞나 싶었다. 그리고 절대로 클락션을 한 번만 누르지 않는다. 삐비비- 삐비삐삡비삐비 이런 리듬으로, 중간에 하이빔 딸각딸각해주며 운행하시는데, 신호등 하나 없는 거리에서 트래픽 잼은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아이씨" 한 번 안 하시는 게 더 신기한 포인트였다. 우리나라는 택시든 버스든 하여간 차를 모는 기사님들은 그 짜증 나는 상황에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씨"가 반사적으로 나오는데, 앞차와 거의 추돌할 뻔 한 상황에서도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그저 오른손은 '삐ㅣㅃ비비ㅃ비삐삐비ㅃ', 왼손은 '딸각딸각'하며 자연스럽게 중앙선 침범. 우리 아이가 아프니까 애써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며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남자 간호사가 깅깅이의 맥박을 잰다. 신원확인을 위한 정보와 주요 증상들을 묻는다. 키와 몸무게를 재야겠다며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 그곳에는 보통 고물상에서 쓰는, 추를 옮겨가며 눈금을 읽는, 수동 저울이 있다. 판수동저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무튼 수동저울에 올라간 깅깅 이를 본 순간, 심각한 표정으로 눈금 추를 이리저리 만지는 간호사를 본 순간, 웃음이 나와버렸다. 간호사는 눈금을 재차 확인하더니 아이의 몸무게란에 단호하게 20kg을 적었지만, 우리 아들은 17kg이다. 노, 히이스 세븐틴 킬로그램. 놉, 투에니. 세븐틴. 놉, 투에니. 예스....


간호사의 벽을 통과하여 만난 응급실의 의사는 정말 의사 같았는데, 그의 영어는 놀랍게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딱 의사 같은 표정, 의사 같은 말투로 뭐라고 뭐라고 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어 재차 물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필기체처럼 말했다. 똑같은 말을 옆에 있는 간호사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고 나서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통역도, 번역도 아닌데, 왜 의사들은 친절하게 혹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무튼 그는 입원할 건지 상담할 건지 말하래서, 난 입원은 아니고 그저 타미플루와 아세트아미노펜정도 얻고자 왔다 했더니 나를 소아과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슬픈 소식은 분명 챗지피티는 나에게 필리핀에서도 타미플루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지만,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독감 검사도, 독감 약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A type flu가 의심되니 검사와 처방을 원한다 했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 한국에서 타미플루를 좀 더 처방받아왔어야 했고, 한국에서는 아직 걸리지 않은 독감에 대한 처방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시 답이 없는 게 맞았다.


소아과로 옮겨져서 또다시 아이의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 새벽부터 열이 났고, 기침을 심하게 한다. 기침은 이런 소리가 나고-기침 한번 해봐. 싫어. 콜록(내가 먼저). 커(깅깅이 소리). 잘했어.-, 얘는 2번 정도 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음식이나 항생제 알러지는 없다, A타입 독감이 의심된다. 39도 이상의 열이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이부프로펜을 오늘 새벽 3시부터 3차례 복용했으며, 교차복용을 위한 아세트아미노펜 처방을 원한다. 똑같은 말로 벌써 3번째. 다행히 소아과의 의료진들은 응급의학과보다 친절했다. 내 말을 경청하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와 깅깅이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의미 있는 진료를 해 줄 소아과 의사를 만났다. 이제 4번째로 깅깅이의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소아과 의사의 진료실은 굉장히 단출했는데, 학교에 있는 학생 책상 2개 정도 넓이의 책상 하나에 기기라고 할 것은 청진기와 스마트폰이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꼼꼼히 듣고, 깅깅이의 폐 소리를 듣더니 폐렴을 예방할 수 있는 항생제 처방을 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또, 필리핀에서는 이부프로펜을 잘 쓰지 않는다며 파라세타몰이라는 해열제를 처방해 주었다. 찾아보니 이부프로펜이랑 거의 비슷하대서 교차복용은 하지 말랬지만, 답이 없어서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컴퓨터 한 대도 없고, 콧물 빼주는 기계도 없지만, 목도 봐주지 않고 오로지 청진에 의지하지만 그래도 권위자가 처방해 준 약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녀가 갑자기 핸드폰 계산기를 켜서 처방전을 수기로 적어줄 때는 조금 뜨악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해열제는 빠뜨려서 내가 다시 말했더니, 활짝 웃으며 미안해! 내 실수야! ^^라고 하고 다시 처방해 줬다.


이제 두근두근 병원비 납부의 시간! 병원비 납부도 내가 못할까 봐서인지 간호사 한 명이 따라와서 내가 병원비를 납부할 때까지 기다려줬는데, 이 친구들은 원래 이렇게 착해서 잘 도와주는 건지, 내가 외국인이라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까 봐 그러는 건지, 인건비가 싼 건지, 내가 튈까 봐 그러는지 궁금했다. 무튼 베리카인드니스 여러분 덕분에 진료비 628페소, 약값 1,446페소까지 결제 완료. 생각보다 병원비가 비싸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행자 보험을 들긴 했지만 진단서를 당장 끊어줄 수 없다기에 다시 끊으러 오기 귀찮았는데, 넘어가도 될 정도의 금액이 나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하였다. 진인사대천명 이랬던가. 나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이제 기도 메타에 돌입하였다. 깅깅이는 약을 먹고도 열이 잡히지 않았고, 교차복용도 했고, 결국에는 핫소스의 타미플루도 먹여버렸다. 이 애증의 타미플루는 결국에는 핫소스가 떨어뜨려서 아무도 못 먹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으며, 그래서 결국 핫소스도, 깅깅이도 모두 5일을 먹지 못하고 이틀 반 정도 분량만 복용하게 되었다. 열이 잡히지 않는 깅깅 이를 두고, 머나먼 타국에서, 타미플루도 없는 타국에서 나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으며, 이 방 밖에는 의료진도, 나를 도와줄 그 누구도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가, 내가 너의 보호자니 마음을 단디 먹겠다 하며 또 마음을 다잡았다가, 깅깅이의 쇳소리 나는 기침 한 무더기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뭐 그렇게 흘러간 밤이었다. 갓 태어난 원숭이처럼 붉어져서 기침을 토해내는 아들을 안으며 새삼 부모의 무게를, 이 먼 땅에서 다시 한번 더 느끼며. 나를 보호해 줄 이 누구인가, 주님밖에 없네, 기도를 하며, 그렇게 긴긴밤을 보냈으니.


하지만 알지 못했지. 더욱 긴긴밤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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