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의 서러움
지난 주말에는 아주 재미지게 놀아버렸다. 서울에서 3시간이나 걸리는 우리 집까지 친히 놀러 와주는 나의 오래된 친구들 덕에 세 가족 12명이 모여 2박 3일간 즐거운 한때를 보냈더랬다. 갓난아기 때부터 만나던 아가들은 이제 많이 성장하여 지들끼리 쑥덕쑥덕 키득대는 사이가 되었고, 어색하던 남편들은 셋만 어디 보내놓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3일 다 밖에서 놀아야만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어서 굳이 굳이 멀리 놀러 다녔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집단 형성이 되어서 집에서만 굴려도 2박 3일을 뿌듯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랄까?
예년보다 훨씬 수월해진 모임이었지만, 이번에도 나의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 문제였다. 어지간한 보드게임은 다 꿰고 있고, 상대를 열받게 하는 게임의 목적에 충실히 임하는, 중학생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드게임 하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니던 겜블러인 나는 뭐 하나 잡히면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의 족적을 살펴보자면 사촌동생들과 함께 스키 타고 놀라고 이모삼촌들이 잡아 준 스키장 리조트에서 이틀 밤새 고스톱을 치다 정작 낮에는 스키는 타지도 못하고 돌아온 이력이 있으며, 대학생 때 모든 MT에서는 밤새 게임을 즐기다 일출을 보고 잠들고 퇴실시간에 맞추어 기상하던 좀비군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술을 한잔도 마시지 못했기에 거의 모든 게임에서 진 적은 없다고 한다. 이외에도 교회 수련회에서 마피아를 하며 거짓증언을 일삼기도 하였고, 카지노에서 일하는 제부와 만날 때면 칩을 한가득 쌓아두고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며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급격한 체력 이슈를 겪게 되는데, 어떤 게임이든 밤 10시부터 본격적으로 재밌어지는 반면 나는 이제 2시 이전에 잠이 들지 않으면 3일을 몸져눕는 노쇠한 육체를 지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꺼내든 식스틴이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친구의 남편분의 귀에 고래고래 "수틀리면 죽여버린다!"를 외치는 무례를 범하며 새벽 3시까지 즐겨버린 나는, 그 뒤로 오늘까지 꼬박 3일을 원인미상의 급체로 고통받고 있다. 내일까지 낫지 않는다면 4일이 되겠지. 이런 늙어버린 나의 몸.
그래도 변한 것이 있다면 이렇게 되어버린 나의 체력이슈가 애석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진 않다는 것이다. 20대 때는 늙는 게 너무너무 무서웠다. 교사로 처음 발령 나고서는 '지금이 가장 젊을 때이니 지금 가장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이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곧 늙어버릴 테니 아이들이 지금처럼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나는 곧 가정을 이룰 테니 지금처럼 '젊은'이의 열정을 지속할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지금이 가장 쌩쌩하니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지금 다 해야지. 뭐 이런. 그래서 막 공휴일에 우리 반 애들이랑 등산도 가고, 방학 때 캠핑도 가고, 토요일에 궁궐탐사도 가고 그랬었다. 시간이 아까워 잠을 미루고 놀고, 받는 사랑이 아까워 더 집착해야만 했던 나의 어린 시절. 젊음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보다 잘 안 늙더라. 비록 체력은 이슈가 생기긴 했지만, 마음이 잘 안 늙더라. 마음이 안 늙으니까 나이는 먹을지언정 열정이 닳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오히려 예전보다 여유도 생기고 노련함도 생겨서 더 많은 것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밤새서 보드게임하는 짓만 안 하면 문제없다.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못하게 되는 것은 애석하다. 하지만 애초에 밤을 새워서 노는 것은 미래의 수명을 당겨 쓰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끊지 못하는 담배처럼 몸에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찾게 되는 니코틴 같은 도파민. 미래 수명만 당겨 쓰는 짓만 멈춘다면 지금도 충분히 젊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다짐이다. 10시 이전에 자고 해 떠 있을 때 놀자는 만 36세의 다짐. 시간 빌게이츠에 돈은 중위소득 100%는 되니까, 체력만 제발 조절하며 놀자. 오래가자 내 인생. 사랑하는 거 좋아하는 거 오래오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