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넘어가나 살짝 기대했었다
B형 독감에 걸렸다
지난 1월에 필리핀에서 걸렸던 것은 A형이었을까? 둘째가 4월 30일부터 열이 나서 불안 불안했는데 결국, 어버이날 어버이에게 전염시켜버렸다.
아이 수준의 면역력으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꽤나 험난한 일이다. 나는 우리 둘째와 독감도, 코로나도 심지어 수족구도 함께 걸렸다. 애가 아프면 그냥 일주일쯤 후엔 나도 아프겠거니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엔 혹시 피해 가나 했지만.
4월부터 지금까지 2주에 한 번씩 수액을 맞고 있다. 올해만 벌써 3번째이다. 내가 살다가 매우 놀라는 점은 수액을 한 번도 안 맞아 본 사람이 은근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뭐,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라든지, 2~3년에 한 번만 돼도 되게 놀랍다. 나에게 수액 없이 생존 가능했던 시기는 딱 스무 살 때 한 해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 해에는 진짜 하나도 안 아파서 나도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하나도 안 아프고 한 해를 났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이제 건강해지나 잠깐 기대했는데 아무렴 그럴 리가! 대학입학버프+인생최초 노 스트레스+학점 2점대의 자유로움으로 얻어낸 건강 뭐 그런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올해는 심지어 쉬는 해인데, 일 하던 해 보다 더 자주 아파서 너무 서운하다. 운동도 꾸준히 하는데! 밤에 잠도 잘 자는데! 그렇지만 독감 걸린 둘째와 첫째를 데리고 부산 여행을 다녀오긴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부산 여행 안 갔어도 나는 독감에 옮을 예정이었다는 것.
나는 건강한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건강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2주에 한 번씩 수액을 맞아야 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아프지 않은 하루가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다. 지금 나는 모든 관절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에, 뇌를 한 번 뜨거운 물에 데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나를 실비보험에 가입시켜 준 회사는 진짜로 잘못 걸렸다. 병원과의 커넥션도 의심할 만하다. 하지만 그냥 그 병원이 빠르게 수액을 놓아줘서 가는 것일 뿐이니 의심하지 말아라. 동네 내과는 거의 노인정 수준으로 어르신들이 몰려와서 1시간 대기는 기본이다. 그런 혼란을 피하고 싶었을 뿐, 여기 원장이랑 뭐 아는 사이 그런 거 아니다.
눈은 뜨고 있는데 뒤통수가 너무 짜릿하게 아파서 그냥 뻘글을 적고 있다. 지금은 뭘 봐도 노잼일 것 같아서 넷플릭스도 보기 싫다. 물론 이미 하루 종일 약 먹고 자고, 약 먹고 잤다. 독감 수액은 9만 원이더라. 나는 돈을 이렇게 쓴다. 얼마 전에 둘째 병원비로 18만 원, 내 병원비로 15만 원. 대한민국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건강보험의 혜택을 미친 듯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만만세.
그래도 필리핀에서는 죽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있어서 견딜만하다. 거기서는 진짜로 죽어도 놀랍지 않을 만큼의 의료 수준+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뭐 테라미플루도 맞고 왔고, 아직 울면서 빌 정도로 열이 나진 않는다. 그렇다, 나는 38도가 넘으면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한다. 이 정도의 지끈거림은 아직 7.5~7.9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주 예민하게 열감을 느껴서 늘 7.7 정도에 해열제를 복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땅바닥 기어 다니며 신을 찾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만성환자가 아닌 사람 중에서 이 정도로 면역력이 바닥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나 너무 궁금하다. 남편은 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라고 하지만, 건강한 삶을 원하는 내 갈망은 너무 큰 욕심인 걸까? 흡연도 안 하고 술도 안 먹고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야채도 잘 먹고 운동도 잘하는데? 간 김에 물어본 경동맥 초음파 결과로는 경동맥 나이가 50대쯤 된단다. 왜 나의 경동맥은 나이를 14살이나 더 먹은 걸까.
그래도 20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건 참 감사하다. 필리핀이었으면 약이 없어서 죽었고, 미국이었으면 돈이 없어서 죽었을 것이다. 19세기였으면 침 맞고 뜸 뜨다 죽고 18세기였으면 백일 떡은 돌릴 수 있었을까. 여러모로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나날들이 맞다. 그래도 부산 다녀와서 아픈 나의 정신력에 박수 보낸다. 사실 부산에서도 계속 으슬으슬했는데, 악바리 자식 면역력은 죽었어도 정신력은 쓸만해 정말로. 정신력 하나로 여기까지 왔음 더. 악으로 깡으로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