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연말정산] 2025 얼마나 잘 살았나

by 첫둘셋

선물 같았던 2025 정산하기!


1. 유사 회사원 생활

꿈에 그리던 오피스라이프를 체험해 볼 수 있었던 한 해!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한다는 점에서도 정말 완벽한 유사 회사원이었다. 세어보면 100번도 출근 안 할 나 같은 나부랭이를 부서의 일원으로 맞아주시고 환영해 주신 모든 부서원들께 감사할 뿐입니다. 진짜로 좋을 때, 좋은 것만 볼 수 있는 책임 없는 쾌락의 소유자, 잠깐 일하는 회사원이라 그런지 회사생활 만족도 1000%였다. 무엇보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모여서 갖는 티타임이 정말 소중했고, 조용히 먹을 수 있는 급식과 카페인 충전타임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교사는 8시 30분에 출근하자마자 들이닥치는 학생들과 몰아치는 수업에 어버버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점심시간 역시 어마무시한 소음 가운데 허기진 배를 빠르게 채우고 안 먹는 애들, 다 먹은 애들, 노는 애들, 이 안 닦는 애들, 일인일역 안 하는 애들, 싸우는 애들 잡도리하는 시간일 뿐이다. 회사에서는 정말 출근이 기다려지는 꿀 같은 휴식시간이 존재하는구나! 를 느꼈다.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차 한잔 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니 사이가 안 좋아질 수가 없다. 교사는 어떻게 보면 섬 같은 직업이라 나서서 옆 반 선생님들과 교류하지 않으면 혼자 고립되기가 매우 쉬운데, 부서 사람들끼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맛있는 것을 나누고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서로 사이가 좋으니까) 매우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관료사회의 불합리함을 매일같이 목격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방면으로 쪼잔한 놈들이 많구나!'와 '이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의 사이에서 미생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더라. 말하자면 입 아픈, 어디에나 있을 법한 꼰대들의 하모니는 아랫것들의 삶의 질과 머리카락 개수를 빠르게 하락시킨다. 덕분에 나빠지는 것은 나의 입버릇이요, 오늘도 이루지 못할 소심한 복수 285개 정도를 마음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볼 뿐이다. 이런 면에서는 아무에게도 명령당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명령으로만 굴러가는 작은 사회를 이끄는 교사인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굳이 모셔야 할 윗사람이 없다는(적다는) 것은 교사라는 직업의 굉장한 매력이다. 내가 승진을 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나의 윗사람은 사실상 공석일지니.

또 다 같이 일하는 협업을 경험할 수 있어 매우 즐거웠다. 교사는 사실상 1인 기획사 같은 느낌이라, 내가 기획하고, 내가 진행하고, 내가 보고하고, 내가 반성한다. 동학년이 많으면 또 모를까, 벌써 7년째 10~12 학급에서 근무 중인 나는 나 홀로, 혹은 매니저 같은 친구와 둘이서 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버렸다. 이것의 문제점은 내가 제일 잘한다는 자만감에 빠지기 쉽다는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인 물의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사들 중에는 보고 배울 교사들이 차고 넘치지만, 같은 교사끼리 서로의 수업방식이나 업무처리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시간 관계상 매우 어렵고, 내가 굳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떠나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나의 방식을 고수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상 썩는 줄도 모르고 고여버리기가 쉽다. 그래서 나는 매우 기고만장해 있었는데, 아무래도 복직 후에 컴백무대를 화려하게 끝내서 그런지 '나 아직 죽지 않았어.'를 온몸으로 외치는 비오빠처럼 혼자 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깡'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연구사님이 가득한 사무실에 떨어지게 되고, 15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하게 되었으니. 아, 나란 인간은 얼마나 작고 무지한 존재였던가!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넘쳐나는 것을! 우리나라 교육의 발전은 이 분들이 다 하고 계셨구나!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다시 처음부터 배워나갈 자세로 바르게 고쳐 앉는 한 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도 소중했던 재택근무의 경험. 회사에서는 나름 부서의 일원으로 회사 돌아가는 일에도 참여했고, 집필 과정에서 집필진들과 협업하는 작업도 했고, 나 혼자서 내 연구과제를 해내기 위해 재택근무를 진짜 열심히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재택근무에 맞는 사람이 아니다. 일단 ADHD가 거의 확정이라 뭐 하나 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매우 많다. 인스타도 해야 하고, 브런치도 써야 하고, 유튜브도 해야 하고, 카톡도 해야 하고, 편지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그냥 '지난 12년의 학창 시절은 나에게 정신적 학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정신이 없는 사람이더라. 정신 차리면 10분이면 끝날 일을 2시간 30분 걸려서 하는 것을 보고-게다가 그놈의 2시간 30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낮에는 안된다.-나는 시간이 무한대라면 무한대로 딴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게으른데 의욕은 넘쳐서 혼자서 데드라인을 만들고, 혼자서 데드라인을 넘기고, 혼자서 마감에 쫓기고, 혼자서 자괴감에 빠지고, 혼자서 뿌듯해한다. 혼자 쫄 리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 작업물의 퀄리티를 스스로 비난한다. 아, 나는 재택근무를 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프리랜서의 꿈, 디자이너의 꿈, 연구원의 꿈, 모든 꿈을 접고 현장직으로 돌아 돌아 돌아갈 준비를 가뿐하게 하게 된 한 해.


2. 배드민턴 동호회가 불륜율 1위인 이유

평일 낮에 하는 운동이 왜 즐거운지 아는가? 평일 낮에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저녁에 운동하는 사람에게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유'. 삶의 여유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평일 낮 운동. 게다가 복식으로 조를 짜서 해야만 하는 운동. 복식으로 조를 짜다 보면 자연스레 모르는 사람과 말을 해야 하고, 타인의 배려를 받아야 하고, 감사한 마음이 생겨야 하고, 감사하다 보면 차라도 한 잔 사게 되고, 그렇게 파트너의 엄마가 해주신 백숙까지 얻어먹는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정리를 해주고, 술을 사주는 관계가 되어버린 우리. 내 친구의 대부분은 교사였는데, 평일 낮 운동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심지어 친해졌다! 교사들끼리만 어울리니 교사가 아닌 사람의 삶에 대해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땀 빼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삶, 나쁘지 않아. 아침부터 나와서 운동하니 뭔가 신체적 건강보다는 관념적 건강에 이르는 느낌에다가, 가장 힘들고 배고플 때 함께 먹는 밥은 뭘 먹어도 정말 꿀맛이다. 코치님이 운영하시는 카페에 들러 2차를 때리다 보면, 다른 밥팀들도 속속 모여들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별 거 없는 아줌마들 대화인데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분명 운동은 12시에 끝났는데 집에 가면 4시가 넘고 아들들이 하교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에 돌아온다. 나 아줌마들이랑 친했었네. 내가 이곳에서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버렸다면 믿겠는가. 나는 그녀와 결혼해야 했어. 그녀는 정말이지 완벽한 가정주부야. 똑 부러지게 살림하고, 살뜰하게 애들 키우고, 남편에게 징징거리지 않는 그녀와 결혼했어야 했다. 듣고 있니, 자기야?

아, 물론 배드민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 아직도 클리어를 못 치지만, 애초에 나의 운동신경은 바닥이었기에 익숙하다. 다만 좀 빨라져서 다가오는 여름에 모기를 잘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냥 나도 승부욕 장난 아닌 사람인데, 배드민턴 할 때는 그냥 사람 좋은 사람 되는 기분. 잘하고 싶은데, 결말을 알아서 그렇게 많이 기대는 안 되는 기분. 못하는 걸 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시간이었다고 하자.


3. 교회 중고등부 선생님의 일 년

올해 처음으로 교회에서 보직을 맡았다. 그것은 바로 중고등부 선생님! 사실 초등학교 선생님한테 주일학교 교사를 맡기는 일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1인으로써, 중고등부 교사는 꽤나 괜찮은 보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고, 다들 키는 나보다 큰데 애기들인 점이 꽤나 귀엽다. 물론 중고등부 교사가 되면서 마음먹었던 것의 반의 반의 반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너무 빨랐던 탓이라고 합리화해 보며, 좋았던 점은 나의 신앙 회복이었다. 남을 챙기려면 일단 내가 건강해야 한다. 남에게 먹이려면 일단 내가 잘 먹어봐야 한다. 아이들과 같이 수련회도 가고, 암송도 하고, 기도도 하는 가운데 내 신앙이 많이 회복됨을 느꼈다. 물론 올해 쉬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쉬는 김에 중고등부 교사도 하고 신앙 회복도 하니 일석 삼조가 아니겠는가?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등 교회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전보다 정확히 2배로 바빠진 일 년을 보내며, 새삼 꾸준히 교회에서 헌신하는 분들의 노고를 느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행사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라(ENFP)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내 삶이 바쁜 가운데 했다면 지쳤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묘하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오가는 말 한마디에, 조금은 누그러든 눈빛 한 번에, 마음이 움직이고 감사가 싹튼다. 바보같이도 '이런 선생님'이라는 말에 힘이 난다. 이런 거에 감동받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부자가 되기는 글렀다고 본다. 똑똑하게 사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나는 좋아하는 애기들이랑 행복하게 살란다.


4. 비수기에 여행 가는 사람, 그게 나예요.

교사가 제일 열받을 때는 같은 여행지를 2배 이상 비싸게 갈 때이다. 그다음으로 열받는 것은 가장 더울 때와 가장 추울 때만 놀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분풀이를 제대로 하고자 올해는 날 좋을 때, 싼 값에 여행을 자주 다녀왔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못 가는 곳을 가자고 마음먹으니 자연스레 멀고 좋은 곳들이 눈에 보였고, 생전 안 가본 지역들을 가게 되더라. 3일에 1000km 정도는 우습게 갈 수 있는 마부가 되어버린 나는, 아마도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다. 서울&부산 롯데월드, 춘천 레고랜드, 경주월드까지 한 해에 다 다녀왔지만 이 얘기는 길어질 것 같으니 나중에 하도록 하자. 한번 더 가고 싶은 곳은 레고랜드이고, 스릴은 드라켄을 이길만 한 게 없더라. 우리 가족 첫 해외여행인 크루즈 여행도 있었는데, 먹는 것 좋아하는 집돌이라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말만 남기도록 하겠다. 3대 가족여행으로 벨포레랑 스플라스 리솜 갔는데, 둘 다 매우 만족스러웠다. 사실 1월 한 달 살기 필리핀 세부는 올해가 아닌 것만 같은데 이것도 올해라는 것이 조금 충격. 이제 여행이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서 12월 한 달 주말은 아무 데도 안 갔는데, 이런 적이 처음인데 너무 좋아. 이제 더는 여행 가고 싶지 않다를 외치며, 1월에 가오슝 항공권을 끊은 나는 거짓말쟁이~ 해외여행은 니 돈으로 가라고 차갑게 말했지만, 아들들 좋아하는 거 보면 10번도 더 데려가고 싶음. 부모 마음 이런 건가 봐.


5. 함께 한 10년, 함께 할 10년

재밌게도 올해는 결혼 10주년이 된 해였 다지. 내 지난 10년의 포트폴리오 같은 남편과, 내 평생 가장 잘 만든 아웃풋 같은 아들 둘이 있어 너무 행복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육아하면서 일하는 게 수영으로 대마도 가는 것처럼 어떤 날에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그랬는데, 확실히 일이 여유로워져서 그런지 요즘은 잠드는 순간에 한 것 없이 뿌듯하다. 양팔에 머리 베고 누워있는 아들들 보면 그냥 잘 산 것 같아. 아직은 보송한 솜털 난 볼도 귀엽고, 얼굴 내밀면 자동으로 뽀뽀해 주는 입술도 귀엽고, 여전히 품에 쏙 들어와 따뜻한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3시간만 이어서 자는 게 소원이던 날들을 지나서, 어린이집 안 가는 아들을 데리고 출근하던 시절을 지나서, 드디어 당도한 평온한 지중해 바다 같은 날들. 지지고 볶는다는 표현이 딱 맞게 울고 불고 싸우고 욕하고 서류를 쓰네 마네 하던 남편과도 이제 열받으면 엉덩이 한대 발로 차버리고 다시 뽀뽀하고 잘 살고 있다. 이 모든 평화가 태풍 매미를 이겨낸 소나무의 그것과 같아서 너무 소중하고 자랑스러워. 나의 지난 10년,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이겠지. 더할 나위 없는 나날들.


정리를 못하는 게 또 나라서, 쓸 말이 너무 많지만 이만해야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50kg이 되어버린 이야기도 해야 하고, 전국노래자랑 나간 것도 써야 하고, 축가 두 번이나 한 것도 자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못 잘 것 같아. 나는 진짜로 나대고 자랑하는 타입이라 뭐 했으면 했다 나불나불 다 해야 마음이 편한가 봐. 그냥 나에게도 수고했다, 애썼다, 올해도 잘 놀았다, 말해주고 싶다. 보수적이 되어버린 나에 대해서도 써야 하는데, 오늘은 이만. 즐거웠어 2025년, 다음 해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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