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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무늬 Sep 10. 2019

각자의 속도로 걷도록

[픽션에세이]

방문을 빼꼼 열어 바깥의 정황을 살핀다.

거실, 안방, 화장실.. 엄마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자는 방문을 열고, 곧장 현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어디 가니?”


아뿔싸. 베란다쪽을 살피는 걸 잊었다.

엄마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중이었나보다.

“아.. 아니 잠깐...”

“면접보러 가? 드디어 다시 출근하는거야? 어?”


그러니까 2주 전... 여자는 잘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걸 찾겠다는게 이유였다.

요즘 일자리 찾기 쉽지 않다며 반대하던 엄마도,

“엄마딸 못 믿어?”
 여자의 큰소리에, 한 발 물러서주었다.


그런데 사실 여자는 당분간 새 직장을 찾고 싶지 않다.

일단 좀 쉬고 난 후에.. 그 다음에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그걸 생각해 보고 싶은거다.

이 시간이 몇 개월이 됐든, 일년을 넘기든, 여자는 상관없는데

고작 2주... / 엄마는 왜 여자보다 더 안달이 난 걸까?

당분간 엄마 눈에 띄지 않고 그림자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김승희의 책 <백년 뒤의 거문고>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오동나무는 백년 뒤에 

거문고가 된다

기다려다오

일백년 동안

콩볶듯이 볶아대지 마오 

맘껏 빈둥거리게 해다오


대체 누가, 오동나무를 이렇게 다그친 걸까.

오죽했으면 콩볶듯이 볶아대지 말라고, 

맘껏 빈둥거리게 해달라고 노래까지 했을까.

아마 오동나무가 거문고가 되기까지

백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랬으리라.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주지 못하고, 

재촉하고 다그쳤으리라.


그나마 오동나무는, 

백년이면 거문고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무엇이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런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콩볶듯이 볶지 말고 맘껏 빈둥거릴 수 있도록-

걸음이 느린 사람을 기다려주자. 

길 위에 잠시 멈춰 선 사람을 기다려주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기다려주자.

내가 나 자신을 기다려주자.


똑같은 길이어도,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갈 수는 없는 법이고,

심지어 우리가 가는 길은 모두 다르니,

각자의 속도로 걷도록,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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