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에세이]그런사람이있었다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고 있다가, 뒷목이 뻐근해 잠시 고개를 들었다.
정면의 벽시계는, 여덟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벌써, 그녀와의 약속시간은,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늦는다는 연락이 왔는데, 혹시 못 받은 건가...
그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확인한다. 하지만, 연락이 와 있을 리 없다.
그녀를 만나려면, 한 시간쯤은 눈 딱 감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전화를 했다가는 버럭 화부터 낼 것이 뻔 하니,
언제쯤 도착하겠느냐고 문자를 보내놓고, 다시 읽던 책으로 눈을 돌린다.
이제 막, 소설의 여주인공이 뱀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뱀이 왜 껍질을 벗으려는지 알고 계세요?
그거 생명을 걸고 하는 거래요.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나요.
그래도 허물을 벗으려고 하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열심히 몇 번이고 허물을 벗는 동안
언젠가는 다리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래요.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하면서요...
별 상관도 없는데 말이죠. 다리 같은 게 있든 없든 뱀은 뱀인데."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지지 않은 다리를 꿈꾸며
목숨을 걸어 허물을 벗는 뱀의 모습이, 꼭... 자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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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 지났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대뜸...
“(여) 어. 문자 받았는데, 답장한다는 게 깜빡했네.
어쩌지? 나 못 나가겠다. 다음에 밥 살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두 시간을 기다린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다 알면서,
떠나지도 못하도록 곁에 둔 채, 몇 년을 기다리게 하고도
오늘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를 또 기다리게 할 수 있는, 못된 여자.
그는, 애초에 자신의 몫으로 주어지지 않은 다리를 꿈꾸며
목숨을 걸어 허물을 벗는 뱀의 얘기가 나오는 페이지를 펼쳤다.
뱀의 얘기 옆에, 연필로, 메모를 한다.
내가 왜 당신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지 알고 계세요?
그거 생명을 걸고 하는 거에요.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죠.
그래도 마음을 얻으려고 또 기다리죠. 왜 그런지 아세요?
열심히 몇 번이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당신이 올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하면서요...
여기까지 고쳐 쓰고는... 마지막 문장도 고쳐 쓰려다가, 책을 덮는다.
뱀은, 다리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이 뱀이지만...
그는, 그녀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는 않으니까.
>>
어제 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오겠지...
오늘 오지 않았으니, 내일은 오겠지...
내일 오지 않는다면, 언젠간 오겠지..
그 언젠가가, 언젠가는 오겠지...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