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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무늬 Feb 07. 2020

나무 뿌리처럼 기다리겠다던 마음조차 내동댕이 쳐버린

[픽션에세이] 그런사람이있었다

친구를 통해서, 그녀가 부산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며칠 야근까지 하고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산 행 마지막 새마을호를 타기로 결정했다.

부산에 도착하니, 새벽 다섯시 반.. 바로 문자를 보내려다가, 

아직 그녀가 일어나기 전일 거라는 생각에 일단 가까운 싸우나에서, 

그도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니 훌쩍 시간이 지나 있었다.


- 나도 이제 막 부산 도착했어. 문자 보면 전화 부탁해.

첫 번째 문자를 보내놓고 두어 시간... 그녀에게선 답이 없었다.

- 밀면 먹고 싶은데... 언제 부산 오면, 니가 맛있는 밀면집 데려가 준댔잖아...

두 번째 문자를 보내놓고 또 한 시간... 무심한 휴대폰은 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아무 가게에 들어가 간단하게 국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운 좋게 영화제 티켓을 구입해, 두 어 시간 또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운다.

그녀가 부산에 와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어디쯤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지 알 방법이 없다.

어쩌자고 그는, 무작정 여기까지 온 걸까...

결국 허탈한 발걸음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막차에 타기 전,

잠시 피씨방에 들러, 그는 그녀에게 메일을 보낸다.


<아직도 생각 중인 거야? 나는 처음 너한테 얘기했던 것과 달라진 게 없어.

 하물며 바위도 흔들리는 법인데, 사람 마음 쯤... 살다보면 한 두 번, 흔들릴 수도 있는 거지.

 너, 하얀색 블라우스 처음 샀을 때, 그 옷만 좋다고 매일 입고 나왔었지.

 그러다 결국, 니가 제일 좋아하는 색 다 빠진 티셔츠로 돌아왔던 거 기억해.

 난 그냥.. 지금이 그 때랑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은 새로 산 블라우스고, 난 오래 입은 티셔츠인 거고...

 하지만 거듭 얘기하지만, 난 정말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

 잠깐 니 마음이 흔들렸던 거... 나는 말끔하게 다 잊는다니까...

 만약 나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라면... 난 괜찮으니까, 너도 얼른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만약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라면, 그럼 난 기다릴게... 얼마든지.../ 연락, 기다릴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무거운 마음으로 기차에 오른다.


>> 


그의 메일을 확인하고, 그녀는 생각 끝에 <답장쓰기>를 누른다.

한숨과 진심을 섞어, 그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내가 왜 답이 없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이유도 알고 있잖아. 난... 너한테, 할 말이 없어.

니가 왜, 지금의 이런 내 상황을, 잠깐 흔들리는 거라고 오해하는 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믿고 싶지 않은 거지, 정말 내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어. 처음엔 나도 너처럼,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지.

그래서 너한테 말 안하고 그냥 스쳐가 주길 기다렸던 거야, 나도.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그 사람이 날 보고 웃는데, 니가 어떻게 웃었더라... 생각이 안 나고-

그 사람이 내 손을 잡는데, 니가 내 손을 잡을 때 어땠지... 떠오르지가 않아.

그 사람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던 순간, 너랑 좋았던 시간들이 통째로 사라졌어. 거짓말처럼.

너무 거짓말같아서, 처음엔 정말 그게 다 거짓말인 줄 알았어.

나도 이러지 않으려고, 내 마음을 막아봤어.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막아지지가 않아. 널 처음 좋아했을때 처럼....

그럼 이건, 이젠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이해하지?


부산에 왔다는 문자는 받았어. 그런데 답장할 수가 없었어.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여긴... 그 사람이랑 같이 왔어.

너 데려가겠다던 그 밀면집엔 그 사람이랑 같이 갔고.

너랑 처음으로 같이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그 사람이랑 했어.

그냥 잠깐 흔들리는 바람 아니야.. 난, 그 사람 때문에 뿌리까지 흔들려.>


메일을 썼다가... 차마 전송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녀는 그냥, 창을 닫아 버린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아플 그 사람 마음, 

내 마음이 널 떠났단 사실을 흔적으로 남겨, 두고두고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 메일을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를, 그냥 이렇게 놓아주기로 한다.


>>


 나무처럼 뿌리박고 기다리겠다 했으나,

그 마음조차 뿌리째 뽑아 내동댕이 쳐버렸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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