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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경복궁 탐방

by 정석진

서울에서 살면서 고궁을 자주 들렀지만 해설을 곁들인 탐방을 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퇴직한 이후 동호회에서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해설사를 대동하는 경복궁 투어를 하게 되었다.

오전 10시 30분에 경복궁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늦지 않게 가려고 서둘렀는데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그런데 막상 경복궁 근처에 도착했을 때 입이 쩍 벌어졌다. 관광객들이 시장 북새통처럼 차고 넘쳤던 것이다. 외국인들부터 시작해서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왔는지 학생들도 많았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긴 행렬이 뱀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관광이 재개되면서 동남아에서 여행객들이 밀려드는 모양이었다.

단체가 아닌 개인은 바로 입장을 할 수 있어서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려 했다. 아뿔싸! 정문에서는 태그가 불가하고 반드시 표를 끊어야 한단다. 부랴부랴 티켓을 구매하려고 했을 때는 거기도 역시 줄이다. 하지만 키오스크에는 사람이 없어서 서둘러 표를 끊어 겨우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은 넘쳐나고 날씨는 무더워서 만만찮은 일정이 될 것 같았다. 대략 2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었고 해설사 선생님으로 부터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계를 넘겨받았다.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관광객들이 입구를 점령하고 있어서 제대로 투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투어는 간단한 경복궁 역사를 들으며 시작했다. 원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왕이 거처하는 조선의 법궁으로 출발했지만 임진왜란으로 전부 소실이 되어 무려 270년이나 폐허로 남았었다. 고종 재위 시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인 역사를 통해 2배 규모로 중건하였지만 또다시 일제에 의해 훼파되고 말았다. 일본 통치의 상징인 조선총독부가 궁 안에 들어서며 왕궁의 위상은 완전히 추락하였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비로소 조선총독부를 과감하게 폭파시키고 복구가 시작되어 지금의 위상을 찾게 되었다. 외국인 관광객의 선호 1순위라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복구 중으로 장기프로젝트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사가 끝나더라도 65% 정도가 복원 목표라고 하니 예전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해설을 통해 궁궐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궁은 정사를 담당하는 외전과 왕과 왕족들이 거주하는 내전 그리고 후원으로 구성된다.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국가의 대소사가 치러지는 곳이 바로 근정전이다. 조정이라고 일컫는 말은 때 바로 근정전 광장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곳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있다. 박석은 평평한 거친 돌 그대로를 깔아 놓은 것이다. 박석은 다소 투박하지만 의외로 많은 장점이 있다. 신하들이 대기 시, 난반사로 눈부심이 없고 비가 와도 바닥이 미끄럽지 않으며 물 빠짐이 좋아 많은 비에도 물이 차지 않는다. 참으로 우리 조상의 지혜가 놀랍다.

근정전과 조정의 박석

광장의 중간에는 통로가 삼단으로 되어 있는데 삼도라고 하여 중간에 왕이 다니는 어도와 오른쪽으로 문관이 왼쪽으로는 무관이 다니는 길로 구분이 엄격하였다. 정문으로는 오로지 왕만이 출입을 할 수 있었고 신하들은 영추문을 통하여 출입을 하였다. 군신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영추문 바로 앞에는 기별청이 있어서 신하들은 승정원의 관보를 통해 궁궐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간에 기별이 없다'는 말의 어원이 바로 이곳에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근정전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왕의 상징물로 왕이 가는 곳 어디나 가지고 다녔다고 하며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장식이라고 한다. 무조건 중국 예법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나마 주체적인 것이 있다고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 원짜리 지폐에 일월오봉도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일월오봉도

강녕전은 왕이 침수를 드는 곳으로 왕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정사로 분주한 삶을 살았고 건강을 위해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 수라는 전국에서 올라온 진상품으로 꾸며졌는데 이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살폈다. 궁인들의 식사는 따로 없었고 왕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참 쉽지 않은 궁인의 삶이었음을 본다. 항상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임금은 다섯 곳을 정해 아무도 알 수 없게 잠자리를 정했다. 왕의 삶도 매우 고단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왕비는 한가한 삶이었느냐면 마찬가지로 녹록지 않은 삶이었다. 가장 큰 책무인 왕자를 생산하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으며 내명부와 외명부를 전부 다스려야 했다. 왕과의 합방도 정해진 일자로 해야 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무엇이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전각의 처마 밑에는 부시라는 그물이 처져있는 데 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조치다. 새들이 살면 뱀이 들어올 수 있고 쉽게 오염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그래서 '망쳤다'라는 말이 생겼다는데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같다.

부시

근정전의 좌우로는 인왕산과 백악산이 자리하고 있다. 처마의 선이 산의 실루엣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경회루와 향원정에 담긴 우리 정서가 녹아든 전통적인 우아함과 격조를 만난다. 튀지 않고 자연과 일치를 이뤄 빚는 동양의 자연스러운 미감이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향원정의 경우 궁궐 깊은 곳에 위치하여 제대로 못 보고 가는 외국인들도 많을 것 같다.

경회루와 향원정

날이 무덥고 사람이 많아 제대로 된 궁의 탐방이 쉽지 않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으로 좀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향후에 지식을 갈고닦아 고궁 해설사에도 도전을 해보고 싶다.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알리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궁을 돌아보며 말미에 명성황후 살해와 관련된 잘못된 역사를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다. 바른 역사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피곤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에세이 #경복궁 #글로성장연구소 #별별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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