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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고궁을 거닐다

창경궁 야행

by 정석진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도 창경궁 야행을 나섰다. 무더위로 힘든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밤에 고궁을 걷는다는 기대가 커서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창경궁은 묘하게 고궁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가 창경원으로 전락시킨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런 연유로 전각들이 마치 옛 궁궐이 아닌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창경궁에 남아 있다. 창경궁의 대전인 명정전이 그 주인공이다. 원래의 건물이 임란으로 불타서 1616년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그 시절 전각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남았다.


사실, 많은 이들이 주로 찾는 경복궁은 조선말기에 중건된 것이다. 지니고 있는 역사는 길지만 현재의 전각들은 오래지 않은 시대에 지어졌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으로는 창경궁이 유서가 더 깊다고 볼 수 있겠다. 제대로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하나를 마음에 새긴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창경궁이 다른 궁궐에 비해 협소하다. 홍화문에서 정전인 명정전까지의 거리가 다른 궁궐에 비해서 아주 짧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 해설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궁궐 옆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있었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춘당지라는 연못과 또 다른 전각들도 있었던 것이다.

춘당지

실제로 창경궁은 이궁으로 지어져서 다른 궁궐과 많은 차이가 있다. 전각들이 동쪽을 향해 건립되었다. 지은 목적도 대비를 비롯한 여인들의 거처여서 생활하기 편리한 공간과 구조로 지어졌다.

창경궁은 아픈 역사를 많이 담고 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였고 정조대왕도 이곳 전각인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무더위는 확실했다. 궁궐 안을 돌아보는 내내 땀이 송골송골 솟는다. 야행이라고 했지만 낮이 길어 밝은 대낮에 돌아보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해설사로부터 궁궐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여기저기 돌아보는 동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다. 밤이 내린 궁궐 뜨락에 등촉을 밝히니 분위기가 낮과는 많이 달랐다. 더위도 주춤해지는 것 같고 고즈넉함이 묻어났다.


전각에도 불이 밝혀지고 구름이 걸린 하늘에도 달이 떴다.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명정전의 아름다운 문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듯한 기분은 나만의 느낌일까? 밤이 깊어가니 전각 곁의 소나무의 실루엣이 드리운 하늘에 달이 그림처럼 떴다. 사극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기분이다. 이것이 궁궐야행이 주는 기쁨이 아닐는지...

거기에 더하여 청사초롱이 연못 주위를 밝히고 있는 춘당지는 신비로웠다. 조명으로 연못에 반영된 숲의 모습이 낮과는 다른 오묘한 풍경을 보여준다. 멋진 경관에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한다. 가야 하는 아쉬움에 연못을 도는 발걸음에 미련이 가득 담겨있다.

춘당지

창경궁 안에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온실이 남아있다. 건축학적인 사료가치가 있어서 보존되었다고 한다. 까만 밤에 크리스털 궁전이 눈부신 빛을 발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사진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멋진 광경이다. 각종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는 푸른 실내도 보기가 좋았다.

온실

시간이 많이 흘러 야행을 마쳐야 했다. 무더운 여름밤을 고궁을 돌아보며 역사탐방을 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좋았다. 궁에 대한 역사를 더 알게 되니 좀 더 친근한 느낌과 소중함을 갖게 된다. 아울러 덥다고 푸념하며 지나갈 하루를 고즈넉한 고궁을 거닐며 추억을 남길 수 있으니 그것 또한 보람이 아닐 수 없다. 후덥지근하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무언지 모를 뿌듯함이 마음을 채운다. 무엇이든 부지런하게 찾아 나설 때 맛볼 수 있는 결실이다.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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