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곡성에 있는 태안사를 다녀온 후 보성강 인근 식당에서 참게탕과 은어 튀김을 점심으로 먹었다. 은어와 참게는 맑은 섬진강이 내어주는 별미다. 실하게 살이 오른 민물에 사는 참게에 시래기를 넣고 진하게 끓여낸 참게탕과 맑은 물에 사는 수박향 나는 은어의 담백한 튀김은 함께 온 일행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참게의 고소한 맛과 은어의 깔끔함이 처음 접하는 낯선 음식인데도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울 정도로 남도의 맛에 푹 젖게 했다.
행복하게 속을 채운 우리는 정읍을 가기 전에 동행의 고향집에 들렀다. 부지런한 노모가 홀로 살고 계시는 임실군 오수면의 텃밭에는 더덕이 심어져 있었고 각종 채소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더덕을 캐보았고 채취한 더덕을 한 아름 받았다. 물론 고구마와 푸성귀들도 풍성하게 나누어 주셨다. 시골의 정을 듬뿍 안고 오후 4시에 구절초 축제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시간 정도 차로 이동하는 국도에는 드넓게 펼쳐진 옥정호가 우리를 반겼다. 옥정호는 섬진강 다목적 댐이 조성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고요한 풍경은 눈을 시원하게 해 주었고 다양한 경치에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축제가 펼쳐지는 정읍의 산내면에는 구절초 꽃들이 길가를 장식하고 있어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다행히 축제기간이 끝난 직후여서인지 교통은 원활했다. 도착한 주차장이 아주 넓은 것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입장료가 7천 원인데 축제가 끝나 무료라 기분 좋게 입장을 했다. 오후 6시에 관람이 끝난다고 하여 마음이 바빠져 뛰다시피 걸었다. 입구부터 만개한 구절초가 눈부셨다. 멀리서도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가 자라는 산비탈 전체에 하얀빛이 넘실댔기 때문이다.
입구에 있는 전망대를 단숨에 올라갔다. 자태가 수려한 소나무들이 자라는 숲자락을 온통 구절초 꽃들이 뒤덮고 있었다. 해가 기우는 시각이어서 산에는 그늘이 드리웠지만 순백의 꽃빛은 오히려 더 선명해 보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묘사처럼 비록 달빛은 없어도 흐드러진 꽃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구절초 꽃은 하얀색처럼 복잡하지 않고 담백하다. 세련되고 화려한 도회지의 여인보다는 순박한 시골 처녀의 수수한 자태를 지녔다. 그런데 소박함이 한데 모이니 화려함을 빚는다. 장관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는 없다. 전망대에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흠뻑 취해버렸다. 일행에게도 이 놀라운 풍경을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빨리 올라오세요'를 나도 모르게 외쳤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꽃길을 걸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늘 꿈꾸는 꽃길이 아닐 수 없다. 가까이서 꽃을 보니 시든 꽃송이도 보였다. 꽃들의 탄생과 죽음이 더불어 존재하는 공간이다. 시든 꽃은 애잔했고 만개한 꽃은 활달했다. 산등성이를 넘으니 더 넓은 꽃밭이다. 오로지 구절초로 심고 재배한 노력과 정성이 가슴으로 전해온다.
꽃빛이 순백만은 아니었다. 순백이 있지만 연분홍빛을 살짝 머금기도 하고 아예 연분홍꽃도 있었다. 다양한 꽃의 변주가 빚는 화려한 꽃의 세상은 몸도 마음도 꽃에 물들게 했다.
구절초로 이어진 꽃밭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붉은 자줏빛 국화가 한바탕 난장을 벌리고 있었고 가을을 대표하는 코스모스도 양껏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가장 압권은 백일홍이었다. 다채로운 색상의 꽃들이 들판을 가득 채우며 총천연색의 화려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축제의 기획자의 발상도 놀랍다. 새빨간 백일홍 한 가지로 단장한 꽃밭은 붉은 꽃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듯 황홀하게 했다.
국화
코스모스
꽃축제를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규모와 구성이 이보다 더 뛰어나기는 어려울 듯싶다. 가을에는 단풍이 대세라지만 이곳은 단풍이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이 축제의 장은 꽃의 전성기가 오히려 가을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정도로 인상이 강렬했다.
백일홍
경사를 오르내리는 산길인데도 꽃에 홀려 피곤을 느낄 겨를이 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꽃이 점령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수많은 꽃들을 보면서도 전혀 질림이 없다.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꽃의 마법이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았다. 이곳에 머무는 이들의 표정에는 아름다운 감정만이 가득하다.
백일홍
함께한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 일색이다. 구절초 축제는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처가의 동서가 추천해 준 여행지로 이번 여행의 백미가 되었다. 때때로 여행은 이처럼 우연이 생각지 못한 기쁨을 안긴다. 일행 모두 꽃이 준 감동을 가슴에 가득 안고 한우로 유명한 산외면을 찾아갔다. 그곳은 도축장이 근처에 있어서 질이 좋고 신선한 한우를 값싸게 맛볼 수 있다. 실제로 방문해 보니 소문 그대로였다. 마무리까지 완벽한 가을여행이었다.
한동안 꽃에 물든 감성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꽃의 축제가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더 많은 이들이 정읍을 찾아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다시 찾고 싶다. 올 가을이 유난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