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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Nov 17. 2023

가을에 만난 목련의 이야기

목련의 꽃눈을 사유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서울숲을 찾았다.

풍요로 넘치던 한 때를 지나 결핍과 인고의 시기를 맞아 비장하게 결의를 다지는 나무들의 준비가 한창이다.

전장에 나가기 전 항전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술을 가득 채운 잔을 마시고 박살을 내는 행사를 치렀는지 발치에는 깨진 그릇 조각들처럼 낙엽들이 뒹군다.

낙우송

그간 무성한 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내밀한 몸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각보다 단단한 녀석들도 있고 앙상한 모습도 눈에  띈다. 감춰져 잘 보이지 않던 세밀한 차이가 확연하다. 갈라지고 거친 피부가 있는가 하면 매끈한 속살을 선보인다.


이 시기에 당찬 녀석들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계절의 변화를 비웃듯 한여름에 피어 전성기를 구가했던 하늘바라기는 여전히 쌩쌩하게 꽃을 달고서 가을볕에 도도하다. 제철을 맞아 몸을 푼 국화가 오히려 생기가 다.


부지런한 나무들은 이미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짐이 되는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는 결단을 내렸다. 이런 단호함에는 뒤돌아 보는 일이나 미련일랑은 추호도 없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에 따라 삶을 단순화하고 이러한 단순함에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음을 그들은 지혜로 안다.

백목련의 꽃눈

백목련 한 그루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안식에 들었다. 누구나 준비를 하고 여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가 다 같은 보조로 살아가지 않는다. 똑같은 목련이라도 다가올 계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푸른 시절을 누리는 나무도 있고, 이제야 미적미적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기도 한다. 누구나 저마다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이로 인한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다. 여유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준비 없는 여유란 무책임이고 만용이고 허장성세일 따름이다.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진정한 여유와 쉼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된다.


매일을 치열하게 살며 사전에 대비한 결실이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꽃눈을 피워냈다. 불필요한 것 하나 걸치지 않은 촘촘한 가지마다 겨울눈이 만발했다. 다가올 계절을 혹독하게 준비했지만 한 걸음 더 나가 봄을 위한 대비를 마친 것이다. 어느 가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빼곡하게 겨울눈이 달렸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준비다. 눈꽃은 단순한 꽃만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찬란한 빛을 머금은 외투 속에는 내일의 꿈과 희망을 담겨있다.

봄을 맞는 환희는 모두 다 같을 수 없다. 이렇게 앞날을 내다보고 준비할 때 찬란한 봄을 맞는다. 긴 겨울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면  준비된 목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순백의 화려한 왕관을 쓴다. 여하한 부족함이 없다. 풍성함이 넘친다. 가진 자의 여유다. 살아있는 기쁨을 온몸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목련

목련은 그렇게 한겨울 내내 꽃을 품고 산다. 꿈과 소망이 분명하고 단단하기에 겨울이 주는 시련을 오히려 즐긴다. 이미 갖추었기에 의연한 것이다.


#에세이 #목련 #꽃눈 #가을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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