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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Dec 31. 2023

폭설 -40년 만에 맞이한 겨울 왕국

눈의 절정을 미사리에서 만나다

베란다로 보이는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 눈이 내리고 있다. 그간 서울에 몇 번 눈이 내렸다는 데, 나는 보질 못했다.  뭐가 그리 급하고 부끄러운지 은근슬쩍 왔다 갔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만 다녀간 흔적을 흘려 놓았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앞 뒤로 눈이 왔다. 흡족한 눈은 아니었다. 눈이 내렸다는 맛만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분명한 눈이 내린다.

집앞 풍경

어제와는 닮지 않은 눈이 빚는 새 세상이 펼쳐진다. 눈송이가 탐스럽지는 않다. 마른 사람들이 예민한 것처럼 눈송이가 튼실하지 않으니 성깔을 내는 것 같다. 눈송이가 바람에 이리저리 달아나는 것이 신경질을 부리는 아이 같다. 배경이 온통 잿빛이다.


오늘은 친한 부부들과 식사 약속이 있는 날이다. 경기도 미사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방송에 걱정이 든다. 차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데 교통체증도 염려가 되고 눈길에 차가 미끄러질까 봐 저어 되었다. 전에 폭설이 쏟아진 도로에서 운전하면서 아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아침도 거른 채 집 밖을 나서니 온통 눈 세상이다. 눈발도 엄청 굵어졌다. 새하얗게 변한 세상에 걱정은 뒤로 하고 경이로운 풍경에 압도된다. 눈이 점령한 겨울 왕국에 들어선 것이다. 경치에 매료되어 사진에 담느라 눈에 젖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출발할 시간이라 마음이 바빠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가 없다.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와이퍼를 작동할 정도로 눈이 퍼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 나간다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진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구했다. 운전해서 오는 친구도 같은 의견이었는 데 모임 장소를 정한 사람은 의견이 달랐다. 큰길은 눈이 녹을 것이고 별 지장이 없을 것이란다.

그렇게 출발해서 미사리에 도착했다. 오는 길도 생각보다 순탄했다. 미사리는 완전한 눈 세상이다.  

그칠 줄 모르는지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식당에 도착해서 주위를 걷는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다. 나뭇가지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친 듯 눈을 이고 있다. 주인을 따라 산책을 나온 강아지 두 마리가 눈 속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내게도 어린이 같은 마음이 내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벌써 누군가 눈사람도 만들었다. 흰 세상은 마음도 희게 물들인다. 하얗게 변한 세상 앞에서 문득 경건해진다. 일행이 찾는 소리에 발걸음을 돌린다.

일행을 만나 점심을 해물칼국수로 뜨근하게 배를 채우고 생일을 기념하여 케이크도 나눈다. 몸과 마음이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눈 속 세상으로 산책을 나선다. 나목들이 순백의 호사를 누린다. 나뭇가지의 선을 따라 눈이 쌓여 음영을 드리운 것이 나무의 자태가 또렷하다. 나무마다 다른 모습에 눈이 부시다. 40년 만의 폭설이라는 데 정말 눈이 많이 내렸다. 그간 목마른 눈을 원 없이 마음껏 즐긴다.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눈 속을 헤치며 걷는다. 상온이라 추위는 없다. 그저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오기를 잘했다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함께 걷는 길이 더욱 정겹다.


나무 고아원에 들어섰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빚어내는 눈의 나라는 경이 그 자체다. 현실이 아닌 동화 속 세상에 속한 기분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이 순진하게 빛난다.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넘쳐나는 눈에 전혀 질림이 없다. 무엇을 만끽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외투에 딸린 털모자를 쓰고 휘적휘적 걷는 길이 너무도 자유롭고 평화롭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이 그려내는 화폭에는 모자람이 하나도 없이 차고도 넘친다. 여백이 담긴 동양화가 끝없이 펼쳐진다. 순백의 고요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적으로 충만해진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눈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세상의 중심으로 느껴진다. 눈 덮인 길이 마치 영원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 길을 한없이 걷고 싶다.

한 해가 저무는 날에 갑자기 행운의 선물이 찾아왔다. 푸짐하기까지 하다. 감격에 겨워 마음도 한없이 넓어진다. 무엇이든 끝이 있는 법,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에 어깨 위로 툭하고 눈이 떨어진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눈의 손길이다. 찻집으로 향하는 길에 눈 속에 대자로 누워 본다. 나도 눈 속에 파묻힌 자연의 일원이고 싶다.


젖은 옷을 털어내고 진한 커피에 몸을 맡긴다. 향기와 뜨거움이 온몸에 퍼진다. 그냥 행복하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꿈같이 흐른다. 즐거운 시간은 왜 그렇게 날개를 달고 달아나는지...


카페를 나오니 벌써 눈이 녹고 있다. 상온으로 다행히 길은 얼지 않을 것이다. 눈이 보여주는 절정을 맛보고 돌아서는 뿌듯한 발걸음이 가볍다. 길거리 나뭇가지에는 벌써 눈이 자취를 감췄다. 여전히 눈이 통치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기세가 꺾여 버린 길을 흔연히 돌아선다. 한 해가 멋지게 저물어 간다.

#에세이 #폭설 #겨울왕국 #눈 #미사리 #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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