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흔히 멀리 가야 산이 있고 숲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심산에 찾아가 만나는 숲이 제일 좋다. 최선이 있다면 차선도 있다. 차선이 오히려 최선보다 더 많은 장점을 지니기도 한다. 서울은 메가시티이면서도 주변에 빼어난 산들이 포진하고 있다. 도심은 특징 없는 아파트로 가득 찬 밋밋하고 멋없는 도시이지만 오아시스처럼 숲이 살아 있어 답답한 숨통을 틔운다. 감사하게도 도심 한가운데에도 울창한 숲을 지닌 산이 있어서다. 심산은 아니지만 그와 다를 바 없고 손쉽게 찾아가 자연을 누릴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안산 자락길
서울 시내에는 남산, 인왕산, 용마산 다 나름 좋지만 서대문의 안산도 참 매력적인 산이다. 안산의 유래는 산세가 말의 안장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들을 때 편안한 산이라는 뜻이라고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의외다. 생김새가 특징을 짓는 구별점이기는 하지만 최선은 아닌 것 같다. 고유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이름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편안한 산이라는 뜻이 나로서는 오히려 마음에 든다.
홍제천
안산 주위로 홍제천이 감싸며 흐른다. 홍제천에는 잉어가 노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생 오리가 살고 있어 천변길도 산책 장소로도 그만이다. 거기에 진짜와 다를 바 없는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인공 폭포가 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하기에 전혀 도심 같지 않다. 심산유곡을 찾아 들어선 기분이다.
홍제천에서 자락길로 들어섰다. 경사가 진 산길을 오르면 꽃으로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숲도 좋지만 꽃들이 수놓는 정원은 또 다른 기쁨이다. 타원형으로 구성된 색색으로 물든 꽃밭이 푸른 나무아래서 산뜻한 생동감을 안긴다. 이어지는 정원에는 각종 허브가 자라 스치는 손길마다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한창 핀 원추리도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저절로 마음이 풀어지는 고운 숲길이다. 조금 더 길을 오르면 데크로 조성된 자락길에 들어선다.
원추리
안산 자락길은 무장애 숲길로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순환형 숲길이다. 7킬로 미터 구간으로 도는 데 약 두 시간이 소요된다. 숲길에는 참나무를 비롯해서 아까시나무, 메타세쿼이아, 독일가문비나무 등이 하늘을 찌를 듯 자라고 있어서 울창하다. 숲길 대부분이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서 그늘길이라 걷기에 그만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꽤나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숲해설 동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 만나는 식물 이야기로 발걸음이 더디지만 신이 난다. 유독 일본목련나무가 아름드리 큰 나무부터 어린 묘목까지 많이 자라고 있다. 꽃은 이미 졌지만 목련 중에 가장 크고 너른 잎들이 시원한 느낌을 선사한다. 관목으로는 독특한 향이 나는 누리장나무와 붉은 열매를 단 딱총나무가 많이 보인다. 보기 힘든 쉬나무를 만나서 반갑다. 아는 만큼 보이는 숲의 다양성은 숲해설가 공부가 주는 보람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독일가문비 숲 사이에는 너른 휴게실이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다. 도시락을 준비해서 찾아와도 좋을 것 같다. 평탄한 데크길이라 전혀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독일가문비 숲에서 우리 일행도 여장을 풀고 3분 동안 숲멍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눈앞에 보이는 푸른 숲을 마음에 가득 담는다. 깊은 호흡을 통해 나를 비워내고 자연을 들이마신다. 주관하는 숲동기가 자작 노래를 들려준다. '난 충분히 잘 살고 있구나 지금 이 숲에 있는 걸 보면. 난 충분히 잘 살고 있구나 좋은 벗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닿는 가사에 친숙한 가락이 감동과 웃음을 준다.
대벌레도 만났다. 아주 신기하게 생긴 녀석이다. 언뜻 봐서는 나뭇가지다. 자세히 봐야 대벌레를 구분할 수 있다. 초록색을 띤 것과 나무 수피와 똑같은 색을 가진 대벌레가 엄청 많았다. 풀에서 자랄 때와 나무에 올라갈 때 보호색이 바뀐다는 점도 신기하다. 이렇게 많이 보이는 이유는 천적이 없어서다. 생태계가 균형을 이뤄야 건강한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안산에는 놀랍게도 마실 수 있는 약수터도 있다. 유명한 산에 가보면 약수가 음용불가인 경우가 많은 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산이 높지 않음에도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니 신기하다. 손을 씻고 한 컵 가득 담아 시원하게 들이켠다. 물맛이 좋다. 소소한 즐거움이 하나 더해진다.
안산은 둘레길도 좋지만 맨발로 걷는 황톳길은 정말 최고다. 관리가 잘되어 흙이 부드럽다. 황토가 굳으면 돌멩이처럼 단단해져 걷기가 불편한 경우가 있는데 이곳은 꽤나 긴 길인데도 대부분 촉촉하다. 가림막도 설치되어 햇빛도 피할 수 있다. 중간에 발 마사지하기에 그만인 질퍽한 황토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곁에 마련된 딱딱한 황토 구슬 마사지는 발바닥이 아파 도저히 밟을 수가 없었다. 발 씻는 공간도 중간중간에 구비되어 아주 편리하다. 아내와 함께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이다. 다 같이 걸었으면 했는데 나 혼자만 걷게 되었다. 혼자라도 걸을 시간이 주어져 감사하다.
황톳길
황톳길 건너편에는 꽃이 만발한 나무가 보였다. 향기가 좋은 지 나비들이 많다. 좀목형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꽃나무다. 작은 꽃송이가 깨알같이 피었는데 밀원식물이라고 한다. 꽃이 작다고 우습게 볼일이 아니다. 화려한 꽃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나비가 그래서 많았나 보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겉보기 보다 내실 있는 좀목형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좀목형
나무와 식물을 돌아보느라 원래 계획대로 한 바퀴를 돌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섰다. 자락길을 내려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도열한 큰 벚나무가 봄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지 상상이 되었다. 안산은 벚꽃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숲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찾아온 건강한 시장기를 자연을 닮은 밥상으로 달랜다. 보리밥과 김치전과 막걸리다. 숲과 벗과 음식이 잘 갖춰진 행복한 시간이다. 안빈낙도를 누리는 날이다. 서울살이도 부지런을 떨면 충분히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