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에 있는 모악산을 올랐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의 바위로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어머니라는 이름에서 푸근함이 느껴진다. 꽤 가파른 오르막 길이 정상까지 이어져 쉬운 행로는 아니었다. 산세가 빼어난 산은 아니었고 아주 평범했다. 절경은 아니더라도 자연의 품은 언제나 좋다. 산 초입에 꽃무릇이 반기고 계곡물은 졸졸 흐르고 숲에는 푸른 초목들이 우거진 고즈넉한 길이었다. 도중에 대원사와 수왕사와 더불어 군데군데 정자와 벤치가 놓여있어 어머니 품처럼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산행은 두 시간 반 걸리는 짧은 일정이다. 점심식사 시간과 맞물려 시간이 빠듯한 이유다. 금번 산행은 2회 차로 처음 등산 때 폭염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어 진행에 큰 차질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원사로 해서 정상에 올라 금산사로 내려가는 코스인데 우리는 아쉽게도 올라 간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서울에서 버스가 출발할 때 날이 잔뜩 흐렸고 빗방울도 떨어졌다. 비가 오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현지에 도착하니 날이 갰다. 그래도 구름이 많이 낀 하늘이라 해가 숨바꼭질을 하듯 간간이 그늘을 드리워 여전히 더운 중에도 산행이 아주 힘들지 않았다.
구월 중순이 되어 산을 오르는 숲에 유난히 기다란 붉은 꽃술을 가진꽃무릇이 피었다. 이제 피기 시작했는지 아직은 꽃보다는 꽃봉오리를 단 가녀린 꽃대가 낯선 풍경이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만날 수 없어 이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화려해도 왠지 외로운 분위기가 풍긴다. 그래서 슬픔을 달래려 무리 지어 피는 것일까? 어울림은 참 아름다운 말이다. 잎이 없이 꽃대만 껑충한 꽃무릇이 함께 모여 온기를 서로 나누는 듯하다.
꽃무릇
깊고 너른 계곡에는 수량이 빈약하다.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데 이곳은 많이 가문 것 같다. 산을 올라보니 산마루 계곡에는 아예 물이 없다. 하지만 티끌이 모여 태산을 이루듯 꼭대기에서부터 보이지 않은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 둘 모여 작은 물줄기가 되고 하류에서는 웅덩이를 이루고 물이 흘러간다.미미한 물 한 방울의 힘을 느낀다.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원사가 보인다. 규모가 작은 사찰이다. 전각 창에 걸린 붉은 연등이 눈에 들어 사진에 담았다. 불자는 아니지만오래된 사찰과 유물에 관심이 많다. 본전에는 특이하게 삼세불이 안치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대개 불상은 지나온 시절만큼 사람들의 신앙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겼다는 시각으로 보면 꽤 흥미롭다. 산길로 이어진 작은 문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출입구처럼 나를 부른다.
대원사 목조 삼세불
가파른 산길이라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숨이 차다. 오늘도 기온은 내려올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멈춤이 없이 오르는 길에 숨은 더 거칠어진다. 다리는 팔팔한데 심장이 요동을 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대는 심장 박동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몸의 살아 있는 소리가 신기하다.
힘이 들어 땅만 보고 걷는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머리를 들어 제대로 가는지 가늠이 필요하다. 다리는 문제가 없어도 심장이 무리가 되니 쉬어야 한다. 마침 정자에 앉아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땀도 많이 흘렸으니 물을 시원하게 들이켠다. 정상까지 다녀와야 하니 마음이 바쁘다. 오래 쉬지 못하고 다신 산을 오른다.
계단이 길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계단 너머가 궁금하다. 우리 삶은 미지로 떠나는 여행이다. 사는 동안 누구나 반드시 떠나야 할 여행이다. 대부분 갈 바를 모르는 여정이지만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천국의 소망이 있다.갈 바를 알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믿음의 힘이 아닐까?
수왕사에 도착했다. 산중에 절이 많은 것은 이곳이 그만큼 믿음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이다. 이곳에서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였다. 생각보다 물이 차가워서 더위를 식히기에 그만이었다. 샘가에는 물봉선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을 바라보며 마음도 쉼을 누린다.
수왕사 샘울
물봉선
오르막길만 이어지다 평지가 나온다.아주 편안한 길이다.고난이 지속될 것 같아도 반드시 끝이 있다. 짧은 행복 뒤에 다시 힘든 길이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지척인데 길은 미로처럼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아쉽게도 정상에 방송국 기지국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모악산 정상이 새겨진 입석이 서있다. 자연은 자연자체가 가장 좋은 것이다. 개방된 기지국에 올라 사방을 조망한다. 굽이치는 산자락과 아스라이 보이는 희끄무레한 강 풍경이 신비롭다. 땀 흘려 올라온 보람을 누린다. 사방팔방이 트인 곳에서 맞이하는 바람이 아주 달콤하다. 정상은 머무르는 곳이 아니다. 잠시 있다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는 것을 온전히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르기는 힘들지만 내려가는 길은 수월하다. 목표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의 짐을 덜었기 때문이다. 미련을 두지 않고 흔연히 내려간다. 가는 길목에 다람쥐가 나타났다. 잠시 후 한 마리가 더 뛰쳐나와 다람쥐들의 달리기 경주가 벌어진다. 그 사이 도토리가 톡 하고 떨어진다. 달리기가 시들해졌는지 도토리 하나를 물고는 정신없이 먹고 있다. 야생의 살아있는 현장을 눈앞에서 누리는 감동을 맛본다.
산을 내려와 고풍스러운 전주시내 한옥 식당 덕진헌에서 왕갈비탕을 먹었다. 한우육회와 도토리묵이 함께 나왔다. 남도의 맛은 말해서 뭐 하랴. 배부르게 먹고는 재빨리 근처의 덕진공원을 둘러보았다. 가는 여름이 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