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무더위가 끝나고 갑자기 서늘해진 가을날이 우리 곁에 왔다. 가을이 시작되는 날, 여전히 여름빛으로 가득한 오대산을 찾았다. 전에 우람한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대가람 월정사를 방문했을 때 상원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그 길을 꼭 걸어보리라는 다짐을 했는데 드디어 오늘 그원을 이뤘다.
상원사 입구
세찬 물이 쏟아 내리는 계곡을 곁에 두고 내밀한 숲 속을 물리도록 걸었다. 가는 여름이 하나도 섭섭하지 않도록 숲은 짙고 푸르렀다. 걷는 내내 따라오는 물소리가 마음을 씻으라고 재촉을 하는 둣 했다.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나도 절로 "좋구나!"라고 외칠 수 있을까? (선재길의 선재는 좋다! 좋구나! 옳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산에 들면 짐을 부려 가뿐한 것 같아도 세상에 들어서면 어느새 다시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진다. 그럴지라도 산길을 걷는 동안은 무욕한 삶이고 싶다.
선재길이라 이름이 붙은 이 숲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9킬로미터의산길이다. 이 길은 다섯 구간으로 철제 표지로 구획되었다. 산림철길, 조선사고길, 거제수나무길, 화전민길, 왕의길로 역사와 유적을 이름에 담았다. 우리가 걸은 트레킹 총거리는 약 11킬로 미터다. 상원사에서 월정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고 세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충분한 여유가 있다면 조선시대 사고를 들러보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뚝 떨어진 기온이 곧바로 느껴진다. 반팔 티셔츠로는 제법 쌀쌀하다. 하지만 산길을 걸으면 체온이 오르기에 바람막이를 입지 않고 숲에 들어섰다. 거추장스러움보다 역시 간편한 것이 옳다. 상원사에 들렀다. 상원사 전각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재건되었어도 국보가 두 점이나 보존되어 있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이다. 현존하는 한국의 최고 오래된 종인 상원사 동종과 목조문수동자좌상이 국보다. 목조문수동자상과 관련해서는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466년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원사 동종은 유리 상자 안에 담겨 있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은 1,3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선명하다. 세밀하고 세련된 부조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의 표정까지 생생하다. 종머리에 위치한 용뉴도 뛰어난 작품으로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기세다. 문수동자는 화려한 금칠로 인해 오래된 유물로 보이지 않지만 물 흐르듯 유려한 옷자락이 인상적이다.
상원사 입구 와 천정화
국보 상원사 동종
비천상
용뉴
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
본격적인 숲길에 들어섰다. 날이 흐려 햇살이 없는 숲에 세찬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많은 비가 내린 뒤라서 그런지 저장한 빗물들을 모조리 토해내는 듯 많은 물이 쏟아진다.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요란한 물소리에 홀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진리는 단순한 데 있다.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시끄러운 물소리가 마냥싫지는 않다. 마음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불편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물소리를 벗 삼아 무심히 길을 간다.숲길은 계곡을 오가며 이어져있어서 단조로움을 덜어준다. 오대산은 심산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산에 가득하다. 즐비한 고목 수피에는 이끼가 덮여 연륜이 느껴진다. 습한 숲에는 버섯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일까? 꽃을 피우지 못한 버섯의 갓이 마치 꽃처럼 피어 있다.
버섯
수풀사이로 투구꽃이 보인다. 보랏빛깔의 꽃 모양이 독특해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꽃이다. 걷는 내내 투구꽃이 따라온다. 귀한 꽃도 만났다. 꽃봉오리를 맺은 남보랏빛 과남풀이다. 용담과로 꽃빛과 꽃모양이 신비롭다.
투구꽃
과남꽃
계곡이 빚어내는 다양한 물길에 시선을 보내며 부지런히 걷는다. 재빠른 달음질로 물은 제모습을 감춘다. 물이 부서지며 생기는 하얀 포말이 마치 눈처럼 보여 짙푸른 나뭇잎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물리도록 이어지는 물결이 빚어내는 외침에 모든 소리가 파묻혀 다른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걸을 때마다 계곡이 시시각각 변모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하지만 급류도 머지않아 너른 곳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것이다.
계곡에는 다리가 다양하게 놓였다. 한 방향으로만 걷지 않고 계곡을 오가며 걸으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출렁다리에서는 짜릿한 전율을 맛본다. 다리 중간에 서서 쉼 없이 흘러가는 물길을 바라본다. 숲도 보고 산도 보 듯 울창한 숲길도 좋지만 가끔은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탁 트인 곳도 좋다. 멈춤이 없이 마냥 내달리는 물길이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네 삶 같다.
꽃에 관심이 있어서인지 산길을 걸을 때마다 다른 이들보다는 세심하게 숲을 살핀다. 꽃도 찾아보는 만큼 만난다. 작은 꽃송이들을 많이 달고 있는 까실쑥부쟁이와 말끔한 숙녀 같은 구절초도 만났다. 붉은 열매가 특이한 백작약과 껑충한 키에 탐스런 꽃술을 가진 각시취도 한창이다. 이름 모를 청초한 꽃도 만났다. 겨울을 제외한 숲에는 언제나 꽃이 핀다. 야생화를 만나는 일도 산을 찾는 기쁨이다.
까실쑥부쟁이 /구절초
백작약 열매 / 이름모를 꽃
각시취
종착지인 월정사에 이르러서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보인다. 경내는 한창 공사 중이어서 단정해야 할 가람이 어수선하다. 대규모 템플스테이를 비롯해서 전각을 짓는 공사가 지속되는 모양이다. 고요해야 할 산중이 점점 번잡한 장소가 되어간다. 이곳에도 국보가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탑 앞에 좌정한 석조보살좌상도 국보인데 복제품이고 진품은 박물관에 있다. 석탑은 금동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있고 팔각의 귀퉁이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귀족적이고 화려한 기풍을 지녔다. 팔작지붕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인 적광전과 탑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문외한이 보아도 국보의 품격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탑이다. 경내에 산사나무가 탐스런 붉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다. 푸른 잎들 사이로 붉은 열매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국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석조보살좌상 복제품
적광전
산사나무
고목이 즐비한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트레킹을 마쳤다. 다행히 시멘트 포장이 아닌 다진 흙길이다. 맨발로 걷기에도 참 좋은 길이다. 거대한 전나무 사이로 쓰러진 600년 수령의 전나무 고목 등걸이 눈길을 끈다. 생명이 스러진 이후에도 남은 자취가 범상치 않다. 연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것 같다. 숲길을 걷는 동안 마냥 흐리던 하늘이 가끔 해를 보여주더니 마칠 즈음에는 푸른 하늘이 지경을 넓혀 가을하늘이 하늘에 걸렸다. 단풍나무가 유난히 많아 가을이 깊어가면 길은 단풍으로 불탈 것 같다. 꼭 다시 오고 싶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