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은 유서 깊은 고장이다. 연천은 최전방 군사도시로 알려졌다. 문화탐방을 해보니 기대이상으로 볼거리 즐길거리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연천 전곡리는 구석기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고, 연천 곳곳이 고구려, 신라, 고려의 역사가 깃든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아울러 민족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로 북한과 가장 근접한 태풍전망대가 있다. 하루 동안 연천을 돌아본 소감은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타입슬립을 한 기분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이런 보고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임진강
서울에서 출발해서 가는 길은 흐렸다. 빗방울도 떨어져 우산을 챙기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가을의 꽃을 만났다. 원색의 밝은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다. 다채로운 소국들의 향연이다. 먼 산에는 비구름에 운무가 신비롭다.
첫 관람장소는 호로고루다. 지명이 이름도 발음도 독특하다. 호로라는 이름은 삼국시대에 임진강을 호로하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구려의 방어 성곽이다.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육상로가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가 멸망 후 신라 성벽으로 가려졌는데 625 동란 당시 인민군 포대로 쓰여 크게 훼손되었다가 마을 주민들에 중장비로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고구려 성벽이 드러나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작은 산이다. 강변에는 솟대가 세워져 예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단단하고 견고한 성벽이 고구려의 기상을 닮은 것 같다. 성벽을 돌아가면 고루를 오를 수 있게 돌사다리가 놓였다. 운무에 가려진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운무에 덮이고 산자취를 물에 드리운 풍경이 고즈넉하다. 내려오는 성벽길에 여뀌의 붉은 꽃빛이 선명하다.
호로고루
임진강
경순왕릉을 찾았다. 경순왕은 신라시대 마지막 왕으로 쓰러져가는 신라를 마의태자와 신하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었다. 무고한 백성들을 위한 애민의 마음이었다. 그 이후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90세 가까이 장수를 했다고 한다.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과는 다르게 봉분이 초라하다. 백성들을 위한 사치를 금지한 데서 온 격식이라고 하니 다시 보인다.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지만 역사의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닐까? 왕릉 주변 바닥에 뒹구는 도토리가 정겹다.
경순왕릉
연천은 동란의 격전지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에서 만난 군마 레클리스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레클리스(Reckless)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레클리스는 경주마로 산간지역 물자 이동을 위해 차출된 군마다. 미 해병대의 일명 네바다 전투(연천 전투)에서 활약을 했다. 포탄과 총탄이 쏟아지는 전투현장에서 포탄과 실탄을 운반하여 전투를 지원했고 돌아가는 길에는 다친 병사를 수송하는 일을 통해 전투를 승리로 견인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를 장하게 여긴 미군들은 전쟁이 끝나고 레클리스를 미국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고 하사관으로 승진을 시키고 훈장까지 수여했다. 20살의 생애를 마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조각까지 세웠다. 역사공원 앞에는 미국에 세워진 동상과 같은 조형물이 당당하게 서있다. 한 마리 말도 전쟁을 위해 헌신을 했고 한낱 동물이지만 그 업적을 잊지 않고 기리는 미군들의 훌륭함도 존경스럽다. 고랑포구의 코스모스가 눈부시다.
군마 레클리스
식사 후에는 숭의전지에 들렀다. 이곳은 고려왕과 충신들을 모시는 숭의전이 있던 자리다. 조선시대에 고려의 왕들을 위한 종묘를 보존하고 유지시켰다는 사실이 놀랍다. 숭의전 가는 입구에는 왕건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이 있다. 시원한 물맛이 그만이다. 이곳에서 고려의 왕건 좌상 조각 사진과 친필을 볼 수 있다. 왕건 무덤에서 발굴된 조각은 나신이다. 국부를 천으로 가린 사진이어서 조금은 생경하다. 사실적이고 완벽한 조각으로 북한에 있는 유물이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사진으로 나마 볼 수 있어서 경이로웠다.
어수정
숭의전지
왕건 조각상
왕건 친필
최전선 태풍전망대에서는 군사시설이라 일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는 최전선의 긴장감이 흐른다. 전망대에서 사병의 해설을 통해 철책선 주변과 전투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보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십 수 명의 병력으로 1천여 명의 중공군을 격퇴한 무용담부터 고지를 빼앗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 전쟁의 기억을 불러냈다.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는 감회도 새롭다. 전망대에 세워진 미군의 희생을 기리는 탑이 서있다. 무려 37천 명의 꽃다운 목숨이 전란으로 스러졌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전곡선사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 규모가 대단했다. 건물외양도 아메바를 닮은 최첨단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다양한 구석기시대 조형물들이 있어 어린 자녀들의 교육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살아있는 듯한 매머드와 코뿔소 그리고 원인들이 압권이다.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이라 이곳은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동아시에는 구석기 문명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단다. 역사를 뒤엎는 놀라운 발견이라 자랑스러운 유적이 아닐 수 없다. 구석기를 제작하는 방법부터 그들이 사냥하고 먹고살았던 일체를 재현해 놓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다. 전 세계의 원시시대 동굴 벽화를 재현해 놓은 곳도 흥미롭다.
전곡선사박물관
주먹도끼
문화탐방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맛본 시간이다. 겨우 하루동안인데도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고대 그리고 근대까지 다채로운 만찬을 즐겼다. 현재를 살아가며 잊고 살았던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소환하는 소중한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