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날 용산가족공원에 갔다. 오랜만에 숲해설가 동기들과 만남이다. 그동안 뉴스를 통해서 간간히 듣다 마침내 가게 된 장소라서 은근히 기대가 컸다.
전철을 타고 도착한 이촌동 보도에는 낙엽들이 수북이 떨어졌다. 미국여행 동안 가을을 체감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느낄 것 같다. 떨어진 잎들은 플라타너스가 대다수인데 단풍이 들기 전에 잎이 말라버렸다. 올해 날이 더워서 단풍이 곱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나무들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화살나무는 아주 붉게 물들어 가을을 제대로 입었다.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이들로 한참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가을 분위기가 나는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열매와 잎의 만남이라고 할까. 입구를 착각한 이들로 결국 30분이 지나 일행을 만났다.
처음 와본 국립박물관 위용이 대단하다. 모던한 디자인과 웅장함을 함께 갖췄다. 입구에는 아직도 꽃이 지지 않고 우리를 반긴다. 버들마편초에 멋쟁이 나비도 남은 가을을 즐긴다. 학생들이 단체로 박물관 견학을 왔다. 소란스럽지만 활기가 넘친다.
박물관에는 의외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앉아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느라 헤매기는 했지만 본관 2층에 넉넉한 곳이 있었다. 맛있는 차와 카스텔라를 간식으로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용산 가족공원을 돌아보기로 하고 나서는 길에 사유의 방이 있었다. 일정에는 없었지만 지나칠 수 없었고 혼자 들어갔다. 온 김에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다.
사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공간에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전시 중이다. 삼국시대 후반에 제작된 우리 문화재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국보다. 다행히도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사유에 빠져있는 모습은 이미 피안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분위기다. 마음이 바빠 정신없이 사진을 담고 나왔다. 여유를 가지고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용산가족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가을이 무르익었다. 실한 모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익어가고 복자기 나무는 화려한 단풍이 절정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에 제대로 가을 나들이를 즐긴다. 담쟁이덩굴도 이에 질세라 진한 화장으로 맵시를 뽐내는 중이다. 우리나라 고유 단풍인데도 당단풍으로 불리는 나무에도 고운 물이 들었다. 따스한 가을볕에 검은 고양이가 졸고 있다.
공원에 들어서자 키다리 느티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충분한 공간에 자라면 수형이 아름다울 텐데 밀식하다 보니 대나무처럼 키만 컸지 옆으로 자라지 못했다. 환경은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영국 정원에서 본 나무들은 너른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라나서 그런지 하나같이 품위가 있었다. 생존이 전제가 되어야 삶의 격조를 누릴 수 있다.
같은 느티나무라도 햇볕에 따라 다채로운 단풍을 선보인다. 조각상과 함께 물든 단풍이 멋진 풍경을 연출했다. 좀작살나무와 계요등은 결실이 한창이다. 보랏빛 구슬과 금빛 구슬이 햇살에 빛난다. 은행나무도 빠질 수 없다. 샛노란 은행잎들이 피고 지고 있다.
계절을 잊은 장미도 한창이다. 날이 더워서 철을 잊었는지 울긋불긋 봄날 같다. 한쪽에서는 산사열매가 붉게 익어간다. 우람한 백합나무도 노란 물이 들어 장관이다. 대왕참나무에도 단풍이 절정이다. 화살나무는 불타는 중이다. 멀리 가야 단풍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각과 어우러진 가을 공원이 아름답다. 나오는 길에 페튜니아와 천일홍이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넨다.
즐거운 가을 나들이 후에 맛집을 찾아 입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후덕한 섬김에 좋은 이들과 웃고 떠들며 가을을 온몸으로 즐겼다. 가을을 누리지 못한 채 지나갈뻔했지만 하루동안 충분히 가을을 누렸다. 뜻밖의 선물을 한 아름 받았다.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