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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넓은 품에 안기다 1

지리산 중주기

by 정석진

무려 40년 만에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그것도 1박 3일로 빡빡한 일정이다. 선배 세 분과 함께 서울에서 밤 11시 버스를 타는 것으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지리산 풍경

출발 당일 저녁 9시에 만나서 필요한 식료품을 구매했다. 총 다섯 끼 분량을 직접 해 먹어야 해서 준비가 만만하지 않았다. 단히 조리할 수 있고 레기를 다 가져와야 해서 최소한 준비만 하려고 했지만 지고 갈 짐이 생각보다 많았다. 먹고사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일임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버스로 가는 동안 나는 비교적 잠을 잘 잤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못 잤다고 한다. 아무 데서나 잘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그런 능력이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일 게다.

절정의 아름다운 지리산 숲길

자리산 성삼재를 앞두고 버스는 높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렸다. 캄캄하고 아찔한 곡예의 길을 기사님은 대낮에 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운전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앞자리에 앉은 선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단다. 스릴과 공포가 공존하는 심야버스 진하게 맛보는 시간이었다.


새벽 3시에 성삼재에 도착했다. 꽤 많은 이들이 산행을 준비 중이다. 우리는 렌턴을 착용하고 어둠 속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꽉 채운 40리터의 묵직한 배낭을 메고 걷자니 비장한 마음마저 든다. 새벽녘이라 쌀쌀한 길이다. 야간 산행은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흥분이 었다. 발 앞을 비추는 불빛에 의지해 어둠을 헤치며 걷는 기분이 마치 어린 시절 어른들 몰래하는 장난 같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으니 그다지 힘들지 않게 노고단 대피소에 올랐다.

야간 산행
노고단 대피소

어둠이 가시지 않은 대피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햇반을 데웠다. 아침 메뉴는 떡갈비와 김치 그리고 김이다. 사로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야외에서 준비해서 밥을 먹으니 본격적인 캠핑 나온 기분이다.

첫 식사

점차 날이 샌다. 샛별 하나만 떠 있는 하늘이 점점 밝아온다. 어둠 속에서 희끗한 부분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밝은 데서 보니 활짝 핀 철쭉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본격적인 종주에 나섰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초록빛이 남아있고 철쭉이 한창이다. 봄이 아직 머물러 있는 공간은 신선했다. 아침공기는 상쾌했고 숲으로 터널을 이룬 길은 녹색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잠에서 깬 새들의 지저귐도 아주 명랑하다. 장 눈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철쭉이었다. 이미 철 지난 꽃이 이곳에서는 절정이었다. 산행 내내 철쭉은 우리를 반겼다.

노고단 입구에서 일출을 만났다. 붉은빛이 하늘에 감돌더니 산 귀퉁이에 해가 빼꼼하게 얼굴을 내민다. 그러자마자 순식간에 동그란 해가 떠오른다. 지리산에서 맞이하는 일출이 감격스럽다.

지리산 일출

고지가 1,500미터 되는 산길에 식물이 빼곡하다.. 넓고 깊은 산에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다양한 풀들이 자라고 있는데 산나물도 많이 보인다. 단풍취는 지천에 널렸고 온갖 취나물과 귀한 어수리도 보인다. 야생화도 많이 피었다. 노루오줌풀, 참꽃마리, 풀솜대, 미나리아재비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지리산의 주역은 단연 철쭉이다.

노루오줌 / 큰앵초
미나리아재비/참꽃마리
풀솜대/ 병꽃

얼른 보기에는 철쭉은 다 비슷한 것 같아도 개체마다 서로 다름으로 다채로운 자태를 지녔다. 주로 연분홍 고운 빛깔이지만 흰빛을 머금어 순결함이 묻어나기도 하고 조금 짙은 꽃분홍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한 송이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무리 지으면 또 다른 멋이 있다. 꽃의 배열에 따른 아름다움도 다르다. 여백을 두고 줄지어 핀 꽃은 동양화 같고 만발하여 모인 꽃은 꼭 꽃구름 같다. 많은 시간을 걷고 또 걷는 피곤한 여정이지만 수시로 만나는 철쭉은 반가운 친구처럼 위로가 된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개활지를 만나면 지리산의 진면목을 만난다. 산자락의 철쭉도 빼어난 풍광이지만 중첩되어 있는 산들이 빚어내는 장면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산만으로 이어지는 순수한 자연의 파노라마가 주는 감동은 높은 산을 오르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지리산은 한없이 넓은 품을 지녔고 끝 모를 깊이를 지녔다. 묵직한 남성적인 매력이 바로 지리산이 품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지리산

10시간을 훌쩍 넘게 걸으니 발바닥도 아프고 지친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몸이 피곤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룻밤 묵을 벽소령을 1.5킬로미터 앞두고 왜 그렇게 먼 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미로에 빠진 것처럼 너무 힘들었다. 힘겹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멀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피곤도 잊은 채 식사준비를 해야 했다. 저녁을 먹자마자 졸음이 몰려온다. 좁고 냄새나는 대피소인데도 아늑한 숙소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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