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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내기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다

by 정석진

이 책의 다른 제목은 상실의 시대다. 여기서 상실은 죽음이다. 꽃다운 나이에 젊고 소중한 생명들이 스러진다.

생을 스스로 끊는 이유는 허망하다. 미래의 꿈이나 악착같이 생을 이어가는 삶의 의지는 어디에도 없다. 하루를 그저 시계태엽처럼 감았다가 풀어지고 다시 감는 기계적인 삶만이 존재할 뿐이다.

플롯을 끌어가는 키즈키의 죽음은 어처구니가 없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유일한 친구이자 나오코의 연인이었던 키즈키는 18살에 목을 맨다. 그들은 하나 같이 세상 속에 뛰어들지 못하고 겉도는 삶을 산다. 이들은 섬처럼 살아가면서 남자 둘에 여자 하나라는 묘한 관계 속에서도 아주 친밀하게 지낸다.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그 바탕은 살얼음판처럼 연약하다. 키즈키는 와타나베에게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나약함을 힘들어하며 자책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허위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환멸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다. 그의 죽음은 나오코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을 주고 마찬가지로 와타나베에게도 지독한 상실감을 안긴다. 이 세상에 남은 그들은 허무함과 죄책감 속에서 18살로 정지된 퇴행의 삶이 이어진다.

죽은 키즈키로 인해 둘은 사랑할 수도 헤어질 수도 없다. 특히 나오코에게는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와타나베이고 와타나베 역시 그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그 둘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하는 듯 보이지만 나오코의 정신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치료를 위해 요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와타나베는 편지와 방문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며 삶을 힘겹게 꾸려간다. 그러는 중에 와타나베는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난다. 미도리도 이상한 여자다. 애인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와타나베를 좋아한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전심으로 좋아할 수 없다. 그에게는 나오코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나오코는 낫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녀 역시 목을 매고 만다. 나오코의 죽음은 와타나베를 폐인 지경까지 이끈다. 이런 그를 구하는 이는 레이코다.

레이코 역시 정신적인 병력이 있는 여자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그녀는 지독한 거짓말쟁이에다 악독한 여자애를 만나 연약했던 정신세계가 무너져 버리고 결국 남편과 아이를 뒤로한 채 요양원에서 생을 보내다 나오코를 만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녀는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들을 품어준다. 나오코의 죽음 이후 레이코는 긴 요양원 생활을 마치고 두려운 세상으로 나와 와타나베를 찾는다. 그들은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위로를 주고받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다. 대학 기숙사에서 만난 나가사와는 뛰어난 외모와 재력과 능력을 가졌지만 지독한 세상을 경멸하는 니힐리스트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심한 삶을 사는 와타나베를 맘에 들어하고 그와 어울린다. 와타나베는 그에게 끌리면서도 그를 경멸한다. 그는 의미 없이 닥치는 대로 여자를 만나며 자신을 소모한다. 그런 그에게는 아름다운 하쓰미라는 애인이 있다. 나가사와는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지만 그녀와 결혼할 마음은 없다. 그런 이기심에 하쓰미는 깊은 상처를 받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그녀 역시 자살한다.

나오코의 죽음은 이야기의 끝이자 시작이 된다. 레이코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와 재회하게 되는 뉘앙스를 풍기며 소설은 끝이 난다.

작가는 감수성이 가득한 문장으로 소설을 써내려 간다. 반짝이는 문장들을 많이 만난다. 주목할 점은 마치 포르노그라피처럼 성애를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본 문화가 성에 대해 개방적인 것은 알고 있지만 60년대 소설치고는 읽는 이들이 불편할 정도 수위가 상당하다. 아마도 삶의 환멸과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쓴 것은 아닐까?

소설에서 죽음은 삶 속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 사건이다. 삶과 죽음이 결코 유리되지 않는다. 이 점은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희망과 꿈이 없는 세대는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고 결국 허무에 젖어든다. 허무의 종착지는 죽음으로 귀결이 난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와타나베는 면면히 삶을 살아간다. 지금 현실을 살아내는 이들의 모습이 바로 와타나베의 모습이 아닐까?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지만 삶의 끈도 결코 놓지 않는 삶. 물론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고 긍정과 희망의 역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게 쉬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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